
상냥함의 독
w. 세렌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것을.
팬텀이 좋아하던 말이었다. 본인과 잘 어울린다는 그다운 이유였다. 그 말대로 그의 주변에는 늘 아름다운 것들이 있었다. 가령, 화사하게 피어난 장미들이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고급스럽게 빛나는 보석이며 장신구들 같은.
루미너스는 팬텀이 그렇게 본인을 치장하는 것에 관해 굳이 참견을 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과는 맞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처음에야 그랬었으니까.
만나기만 하면 으르릉 거리는 좋게 봐줘도 동료 이상은 아닌 관계에서 온갖 우여곡절 끝에 연인이라고 불릴만한 사이로 발전한 이후 팬텀은 틈만 나면 루미너스에게 선물을 건네주기 시작했다. 자기걸 사면서 생각나서 같이 사왔다던지, 지나가다 그 수수한 방에 두면 좋을것 같아서 사왔다던지,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문제라면 그게 루미너스에겐 부담으로 다가왔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안주더라도 팬텀은 신경쓰지 않겠지만 루미너스는 그럴 수 있는 성격이 되지 못했다. 받기만 하기도 미안하니 뭐라도 사줘야할까 싶다가도 보는 눈이 없어 오히려 팬텀이 실망할까 싶어 막 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안 받으려고 하면 비에 젖은 개처럼 축 처지는 팬텀의 모습을 보자니 도저히 안 받을 수도 없던 것이다.
그런 하루하루가 반복되면 안 그래도 눈치 좋은 팬텀이 루미너스가 불편해 하는 것을 눈치 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쩌면 이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길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동안 알게 모르게 삐걱거리던 관계의 끝을 선언한 것은 팬텀이었다.
"샌님은 너무 상냥해. 그게 문제야. 그 상냥함이 누군가에겐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
이별을 선언하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이야기하던 팬텀의 모습은 이제껏 루미너스가 알던 모습과는 너무 달라서, 이제는 그와 별다른 관계가 아니라는걸 아는데도 그 한 문장이 도저히 잊혀지지 않았다. 팬텀과 헤어진지 얼마 안 된 시점에는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도 못했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었지만.
지금에야 그 시절의 자신이 인간관계에 있어 한참 미숙했고, 그랬기에 그를 상처주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일을 사과하기에 팬텀과 루미너스의 관계는 이미 동료라는 이름이 아니면 만날 일 조차 거의 없는 타인에 가까운 사이였다. 무엇보다 그에게 사과할만한 용기가 루미너스에게는 없었다.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그에게 말을 꺼내야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또 다시 이전처럼 어영부영 지나가는 시간 속에 루미너스는 자신의 눈치 없음을 한탄했다. 미숙했던 과거를 깨달았다고 해도 여전히 자신은 그때와 똑같았고 여전히 미숙했다. 그것만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 따윈 없었고 생각한다고 뭔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훌훌 떨쳐버리지도 못하고 끌어안고 있기만 하는 루미너스의 모습은 스스로가 보아도 한심할 지경이었다.
다행이라고만 생각해선 안 되겠지만 연합의 상황은 점점 급박하게 돌아가 루미너스가 혼자 깊이 생각에 잠길 틈은 한시도 없었다. 이리저리 일에 치이고, 적들과 싸우며 잠시나마 팬텀이 했던 말을 잊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다. 물론 큰 의미는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전투 중 동료가 다치고 사망하는 일은 무척 괴롭지만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한 일이었다. 그런 동료들의 모습을 보고 도움을 주려 전선을 이탈할 뻔 한 적도 가끔 있었고, 그럴 때마다 팬텀의 질책을 들으며 결국 동료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채 자리를 뜰 때마다 자신이 무르지 않았더라면 좀 더 좋은 선택지가 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때 팬텀의 말이 변명처럼 생각나 후회와 부딪혀, 한눈을 팔 수 없는 상황 속에 섞여 흩어져갔다.
스스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조차 명확히 정하지 못한 그대로,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만 갔다. 적진의 꽤나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고, 들키지 않고 들어갈 수 있는 소수의 인원이 꾸려져 잠입하는 당일이 될 때 까지. 초반에는 다들 실력이 어느 정도 입증된 사람들이 모인 만큼 긴장감이 없지야 않았지만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 루미너스도 그 여유에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 정말 작은 실수만 아니었다면 아무 문제없이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부족해 통로에 존재하는 위험요소에 대해 전부 파악하지 못한 탓에 보고받지 못했던 몬스터의 급습에 여유로웠던 분위기는 깨지고 혼란에 빠졌다. 그 상황 속에서도 팬텀과 루미너스를 포함한 몇몇 인원은 어떻게든 상황을 타파해보려 애썼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계는 있었고, 상황이 일단락될 무렵 팬텀의 모습은 독에 중독되기라도 한 것인지 도저히 이 이상 전투를 계속 할 수 없을 것 같을 정도였다.
급하게 해독제를 꺼내든 루미너스의 손을 붙잡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팬텀이었다. 그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루미너스가 멈칫하자 팬텀이 다 죽어가는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든 냉정한 표정으로 루미너스를 보고 있었다.
"샌님 바보야? 동료라고해도 지금 당장 짐덩이 밖에 안 되는 사람까지 챙길만큼 우리가 여유로운줄 알아? 샌님의 그 무른 상냥함이 언제까지고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하지 마. 오히려 걸림돌이니까."
독이되는 상냥함보다는 약이되는 냉정함을.
확실히 지금 팬텀의 상태는 전장에 참여할 수도 지금을 어떻게 넘긴다고 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루미너스도 알고야 있었지만 당장 눈앞에 죽어가는 사람을 두고 그 누가 그리 쉽게 냉정한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과거의 연인이자 현재의 동료인 사람을 두고.
팬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루미너스가 아무리 스스로 고치려 한다 해도 그의 선천적인 상냥함이 그리 쉽게 사라질 수 없으리라는 것쯤은. 그럼에도 그는 그 상냥함을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 한 것이다. 팬텀도 어디까지나 냉정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어쩌면 당장 위험에 처한게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루미너스에게 한 부탁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걸 뒤늦게나마 깨달은 루미너스에게 더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자신보다 상황판단이 뛰어난 팬텀이 내린 결정이었다. 그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는. 하다못해 몬스터에게 쉽게 들키지 않도록 구석으로 팬텀을 옮겨준 루미너스와 연합원들은 각자 팬텀에게 한마디씩 인사를 건네고는 마저 길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그의 곁은 떠난 루미너스가 본 팬텀의 모습은 무척이나 편안해보였다.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죽음을
루미너스가 줄 수 있는 첫 선물이자 마지막 선물이며 마지막 배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