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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을 위한 잔혹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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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Plum

*​가학적 묘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인의 포획-해체-박제 과정에 관한 짤막한 묘사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것을. 우리 아버지가 좋아하던 말이야, 그렇게 덧붙인 팬텀이 팔을 뻗어왔습니다. 화관에 돋은 장미의 가시가 루미너스의 여린 살결을 직선으로 긁어내려가며 붉은 열상을 남겼습니다. 그가 가볍게 목줄을 잡아당기자 이제껏 루미너스의 목에 자리했었던 투박한 쇠사슬 대신 가시 가득한 넝쿨이 사방에서 숨통을 옥죄어왔습니다. 늘어진 장미 꽃잎이 살갗에서 배어 나온 핏물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습니다. 꼭 장미가 장미를 낳는 것 같아. 환희로 가득 찬 음성이 귓가에서 일렁였습니다.

 그가 맨몸에 걸친 순백의 모피코트로부터 동족의 피비린내가 역하게 풍겨왔습니다.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동족들이 저 역겨운 발 치 아래에서 내일을 갈구하고 선처를 애원하고 저주를 퍼 붓다 끝내는 비명이나 고함 대신 루미너스의 목에 얹어진 화관의 장미만큼이나 검붉은 선혈을 목구멍 너머로 꾸역꾸역 토해내며 스러져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체는 조각조각 해체되어 지금의 그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하나의 오브젝트로써 전락했겠지요.

그래서 루미너스는, 그를 증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음에 들어?”

 타의에 의해 현존재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 동족들의 잔해를 철창 너머로 수 백 수 천 번 목도한 끝에 너비도 깊이도 모를 아득한 무력감에 침식당한 두 눈이 팬텀의 형상을 온전히 비추었습니다. 케이지 앞에 쭈그려 앉은 그가 엄지와 검지로 루미너스의 턱 끝을 틀어쥐었습니다. 그제만 해도 동족의 살점을 후벼 파던 손끝이 제 살갗에 와 닿자 밀물처럼 울컥 밀려온 구역감이 위장 저 깊은 곳 어드메를 혼란스럽게 휘저었습니다.

 대답, 하고 그가 채근하자 이내 볼개그로 틀어 막힌 주둥아리에서 사람의 언어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짐승의 울부짖음 인 것 같기도 한 해체된 음절이 온갖 정념들과 함께 줄줄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당신을 미워해, 저주해, 그러니 당신이 꼭 당신의 아버지와 같은 몰골로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증오를 꾸역꾸역 토해내는 아가리에서 제대로 된 언어 대신 흐른 타액이 턱을 타고 내려 목 언저리에 가득한 혈흔을 지워냈습니다. 꼭 애완동물을 진정시키기라도 하는 양 부드러운 손길로 루미너스의 머리칼을 쓸어 넘긴 그가 제 손 끝에, 그리고 피부에 짙게 배인 수인들의 혈성血腥과는 상반되는 해사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좋다면, 나도 좋아.”

루미너스를 향한 경멸과 애정이 기묘한 모양새로 엉긴, 극약 같은 고백을.

 

1.

 

 바늘에 실 가듯 부에 항상 명예가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에 항상 인정이 뒤따르는 것 또한 아닙니다. 부유하되 명예는 없는 집안, 필요하되 인정받지는 못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집안, 팬텀이 나고 자란 집안이 바로 그런 가문이었습니다.

 수인이 말살해야 할 경멸의 대상임과 동시에 부의 상징으로써 여겨지기도 했던 사회에서 그의 아버지는 꽤 이름난 수인 사냥꾼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상대하는 고객은 대개 명망 높은 귀족집안의 자제들이었는데, 명예와 고결성을 정체성의 전면에 내세우고선 수 억 수천을 들여서라도 박제된 희귀종들의 사체를 탐닉하고자 몰려드는 꼴이 꼭 비열한 하이에나와 같아 팬텀은 어릴 적부터 짐승만큼이나 귀족을 경멸했고 허울뿐인 명예를 증오했습니다.

 물론 그렇다 하여 팬텀이 제 아버지의 직업에, 그리고 제 가문에 떳떳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걸음마를 떼기도 전부터 케이지에 갇힌 수인들을 수없이 마주해왔고, 글자를 배우기 전부터 그들이 제 아버지의 손에 뼈와 살로 해체되는 과정을 지켜봐왔으며,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수인의 열등성과 해악에 관한 지식을 끊임없이 주입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 깊이 자리한 단 하나의 의문은 해소될 생각을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로 짐승과 다르지 않을까? 인간과 동일한 외양을 가진 존재, 인간과 동일한 언어체계를 통해 소통하고 사고할 수 있는 존재. 만약에 그들이 진정으로 짐승보다는 인간과 가까운 존재라면, 아버지나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어린 팬텀이 처음으로 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을 때, 그의 아버지가 대답 대신 내놓은 것은 팬텀의 몸집만한 케이지 하나였습니다. 케이지 전체가 두터운 베일로 뒤덮여 속에 있는 것이 무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베일 너머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에 불안감이 가득 묻어있다는 사실만은 확연히 느껴졌습니다. 꼭 살갗에 와 닿은 뼈칼이 제 복부를 가르기 직전 수인들이 내뱉곤 하는 것과 같이요.

 케이지를 눈앞에 두고서 머뭇거리던 팬텀을 향해 곧 천을 걷어도 좋다는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팬텀이 베일의 밑단을 쥐고서 조심스레 끌어당기자 훤히 드러난 케이지의 내부에 팬텀의 또래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 들어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두 무릎을 끌어 모아 웅크려 앉은 채 제 작은 몸을 어찌하지 못하고 달달 떨고 있는 꼴이 팬텀의 눈엔 꽤 안쓰럽게 비쳤지만, 소년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에는 조금의 동정도 비치지 않았습니다.

 베일이 완전히 걷히자 소년이 제 무릎에 고개를 묻었습니다. 오랜 시간 어둠 속에 갇혀있다 사방에서 느닷없이 쏟아져 들어온 빛에 적응하지 못한 탓입니다. 소년이 고개를 숙이자 그 머리통에 인간의 것과는 다른 모양의 두 귀가 솟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만 보니 군데군데 검은 얼룩이 있기는 하지만 눈처럼 희고 복슬복슬한 꼬리도 둔부에 돋아나 있었습니다. 꼬리의 털이 마치 고슴도치의 가시와 같은 모양새로 하늘을 향해 바짝 곤두서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꼭 소년의 심정을 생생하게 대변하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버지, 어째서 수인을…….”

 팬텀의 물음에도 한참동안 침묵을 고수하던 아버지가 곧 입을 열었습니다. 그들이 정말로 짐승과 다르지 않느냐 물었지? 아버지가 팬텀의 손아귀에 케이지의 열쇠를 꼭 쥐여 주었습니다. 동전 한 닢 정도 무게의 열쇠가 오늘따라 왜 이리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혹여나 놓칠 새라 열쇠를 두 손으로 고쳐 쥔 팬텀이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팬텀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죠.

“이 아이가 네 물음에 대한 답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린 팬텀이 이해하기에는 한없이 난해한 답변만을 남기고 아버지는 그렇게 문간을 나섰습니다. 제 의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얻지 못하고 해석할 수 없는 문항으로만 가득 들어찬 시험지 수장을 받아 든 기분으로, 팬텀은 문간을 나서는 아버지를 붙잡지도 케이지를 향해 더 다가서지도 못한 채 한참을 멍하니 서있어야만 했습니다. 눈앞이 막막하기만 했거든요.

 도대체 이 어린 수인을 어찌 하라는 건지, 이 소년이 어찌 내 물음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는 건지. 혼란 속에서 케이지 앞으로 발걸음을 한 보 내딛은 팬텀이 두 손으로 철창을 붙들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 소년이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팬텀을 바라봤습니다. 너, 이름이 뭐야?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아 제 아버지와 달리 위압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미성으로 팬텀이 제게 말을 걸어왔지만 소년은 여전히 겁에 질린 채 가만히 웅크려 앉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소년에게 있어 인간이란 모두 적대해야 할 공포의 대상으로만 느껴질 뿐이었거든요. 역사 깊은 갈등 끝에 유전자 깊숙이 각인된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란 본디 그런 것이었습니다.

붉은색과 푸른색, 마치 반인반수라는 제 정체성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색이 다른 두 개의 눈동자, 그 속에 비친 색이 다른 두 개의 세계가 두려움으로 잘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팬텀과 달리 포식자로서의 제 위치를 자각한 그 귀족들이었더라면 소년의 두 눈동자를 보고서 분명 이렇게 이야기 했을 겁니다.

이 아이는 값이 꽤 나가겠어. 저 눈으로 브로치를 만들면 꽤 근사할 거야.

 그러나 팬텀은 가증스러운 가면 아래 이종을 핍박하며 희열을 느끼는 역겨운 귀족들과 달랐습니다. 수인에 대한 짙은 편견에서 기인한 우월감에 젖은 채 수인의 안구를 멋진 장식품으로, 수인의 털을 화려한 옷감으로, 수인의 뼈대를 근사한 무기쯤으로 여기는 그들과 달리 팬텀은 소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싶었거든요. 눈앞의 소년은 남들과는 조금 다른 귀와 꼬리를 가지고 있을 뿐 학교에서 늘상 마주치곤 하는 또래 친구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아이라고, 그러니 저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여기는 칼도 없고, 채찍도 없어.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팬텀이 그리 말하며 철창 사이로 팔을 뻗자 소년이 몸을 움츠렸습니다. 소년의 귀에는 저 나긋나긋한 음성이 그저 포식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의 표상으로써만 받아들여질 뿐이었거든요. 나는 절대로 너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내 모든 것을 걸고 그리 맹세할 수 있노라고, 계속해서 소년과의 대화를 시도해보아도 결국 그 날의 소년은 팬텀에게 마음의 문을 조금도 열어 보이지 않았답니다. 둘 사이를 가르는, 그다지 촘촘하지도 않은 철창에 팬텀이 내뱉은 그 모든 진심이 깨끗하게 걸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죠.

“내일은 꼭 나랑 놀아 줘야해?”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끝내는 제게 먼저 다가오지 않는 소년을 향해 팬텀이 혼자만의 다짐을 내뱉고선 침상에 몸을 뉘였습니다. 그리고 소년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팬텀을 바라봤죠. 인간과는 달리 어둠 속에서도 형형히 빛나는 두 눈동자로요. 팬텀과 소년의 첫 날 밤은 그렇게 저물었습니다.

 이후로도 팬텀은 소년과 가까워지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버지께 인사를 올리기도 전에 소년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고, 저녁에 돌아오면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케이지 앞에 붙어 소년이 묻지도 않은 제 하루 일과를 구구절절 읊곤 했죠. 제발 대답 좀 해줘, 응? 팬텀의 채근에도 소년은 입을 굳게 다물고선 팬텀을 바라볼 뿐, 단 한 번도 팬텀의 말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준 적이 없었습니다. 팬텀과 며칠 간 얼굴을 마주하며 그가 제게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란 건 깨달았는지 팬텀과 얼굴을 마주 한 첫 날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지는 않았지만, 팬텀을 향한 경계를 좀처럼 풀지는 않는 것이었죠. 피식자가 포식자를 신뢰하기란 어려운 일이니까요.

 소년은 팬텀이 건네는 음식에도 손을 대는 일이 없었습니다. 매일 같이 식사를 걸러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가는 덕분에 팬텀의 마음은 소년에 대한 걱정으로 심란하기만 했죠. 매 끼니마다 철창 사이로 건넨 날고기가 쌓이다 못해 끝내는 썩어 문드러져 온 방안에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지경에 이르자, 결국 팬텀은 아버지로부터 조언을 구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매를 들라는 것뿐이었죠. 아버지가 수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너 또한 채찍을 들면 해결될 것이라고요. 그들은 멍청한 짐승이기 때문에 맞아야만 사람의 말을 이해한다고요.

 그러나 팬텀은 아버지의 말씀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소년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픈 건 나쁜 것입니다. 친구에게 나쁜 것을 주는 사람은 악인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악인은 미움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죠. 호감의 대상에게 미움 받길 원하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아직 어리고 여린 팬텀의 마음은 저를 향한 타인의 부정적 감정을 기꺼이 감내할 정도로 단단하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팬텀은 매를 드는 대신 소년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보기로 했습니다. 아버지가 제게 건넸던 열쇠로 케이지의 문을 열고서, 소년에게 따뜻한 손길을 뻗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팬텀이라고 소년이 두렵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창고에서 마주한 수인들은 하나 같이 겁에 질려 거칠고 사나웠기 때문입니다. 다들 같은 체격의 인간들보다 곱절로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을 감추고 있기도 했고요. 그러나 팬텀은 소년을 믿어 보기로 했습니다. 상대가 나를 믿어주길 원한다면 나부터 상대를 온전히 믿어야 하는 법이니까요.

 열쇠구멍에 열쇠를 단단히 밀어 넣은 팬텀이 열쇠를 우측으로 돌렸습니다. 둔탁한 소음과 함께 잠금장치가 풀리자 팬텀과 소년 사이를 가르고 있던 철창의 문이 스르르 열렸습니다. 난데없이 열린 출구에 고정된 소년의 시선이 팽팽한 긴장감을 담고 있었습니다. 제 몸집만한 케이지의 입구에서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팬텀이 이내 소년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팬텀이 제 공간에 발을 딛자마자 용수철 튕기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소년이 경계 가득한 눈으로 팬텀을 바라보며 한 걸음 씩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좁은 케이지 안에서 소년이 도망칠 수 있는 거리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딱딱한 벽이 등에 와 닿자 상체를 움츠린 소년이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팬텀을 바라봤습니다. 소년의 코앞까지 다가선 팬텀이 팔을 뻗어 소년의 머리 위에 손을 얹자, 순간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악력으로 팬텀의 손목을 틀어쥔 소년이 이내 제 발 치에 뚝뚝 떨어지는 선혈을 보고선 얼굴에 면면히 드러난 당황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소년의 손톱이 여린 팬텀의 살갗을 파고들어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었습니다.

 분명 어린 아이의 몸으로 감내할 수 있을 고통이 아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혹여나 소년이 놀랄까, 입새를 비집고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꾹꾹 눌러 참은 팬텀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소년의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었습니다. 괜찮아, 널 해치려고 온 게 아니야. 괜찮아, 나는 아프지 않아. 팬텀이 주술처럼 그 두 문장만을 되뇌자 팬텀의 손목을 잡은 소년의 손에 스르르 힘이 풀렸습니다. 소년이 팬텀의 손목을 놓자, 팬텀의 손가락을 타고 흐른 피가 바닥에 붉은 장미 꽃잎과 같은 혈흔을 남겼습니다.

“잘했어, 이제 우리 밥 먹자.”

 호의를 베풀다 저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망 섞인 비명 한 번 내지르지 않은 팬텀을, 저를 진정시키기 위해 소리 내어 울지는 못하고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그리 말을 걸어오는 팬텀을, 소년이 어찌 거절할 수 있었을까요. 팬텀이 다른 인간과 조금은 다를 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소년이 어찌 걸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 날 소년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기나긴 의심을 잠시 접어두고서, 또, 인간에 대한 증오심과 자유를 향한 갈망을 잠시 내려놓고서, 팬텀에게 조금이나마 다가서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내 이름은, 루미너스야.”

 설사 그가 제 눈앞에서 동족을 몇이나 해한 역겨운 남자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2.

 

 어머니, 왜 나는 학교에 갈 수 없죠? 아버지, 왜 우리는 산 아래로 내려가면 안 되나요? 우리는 인간이 아닌가요? 왜 우리는 인간이 될 수 없나요?

 그 누구도 그 물음에 대해 제대로 된 해답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어린 루미너스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잔혹한 현실이었던 탓입니다. 어린 아이는 꿈을 꾸고 또 꿈을 먹으면서 자라난다죠. 그러나 이제껏 루미너스가 지나온 성장의 역사는 오로지 생존을 위한 지독한 투쟁의 나날로만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김새의 아종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역사로.

 왜 저들과 우리는 다르냐고, 왜 저들은 우리를 핍박하느냐고, 왜 우리는 저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 살 수 없느냐고. 자아를 의식하면서부터, 더 나아가서는 나와 타인을 구별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루미너스를 끊임없이 괴롭혀 온 지독한 의문은 곧 그의 일족과 몇 명의 인간이 우연히 얼굴을 마주하게 된 비극으로부터 이른 마침표를 찍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창에 꿰뚫린 아버지의 창자가 눈 바닥에 쏟아져 내리고, 그들의 총에 맞아 얼굴을 잃은 어머니의 상체가 버려진 정자 위를 나뒹구는 가운데 루미너스는 자연히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 나는 악마들과 공생하고자 한 것 이었구나.

 인간들의 수색을 피해 불을 떼지 않은 아궁이 속에 웅크려 앉은 루미너스는 기도하고 또 기도 했습니다. 제발 이 지독한 악몽에서 깨어나게 해주세요. 제발 저들이 날 찾지 못하게 해주세요. 제발 이 모든 게 꿈이라고 해주세요. 올가미에 걸려 꽥꽥 비명을 내지르던 제 형제들의 목소리가 총성과 함께 잦아드는 순간에도, 눈 위로 무언가 질펀한 액체가 후두둑 쏟아져 내리는 듯 기분 나쁜 소음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순간에도 루미너스는 눈을 꾹 내리감고선 간절히 되뇌고 또 되뇌었습니다. 그러나 무심한 신은 나약한 포식자의 기도에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부엌 주변을 서성이던 발걸음 소리가, 마침내 루미너스의 앞에서 뚝 멎었거든요.

“이런 곳에 숨어있으면 어떡하니.”

 다정한 어투이지만 감정의 고저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제 모든 게 다 끝이구나. 그렇게 직감한 루미너스가 꾹 내리 감고 있던 눈을 뜨니 루미너스가 처박혀 있던 아궁이 안으로 고개를 불쑥 내민 중년 남성이 소름 끼치는 미소를 입가에 건 채로 루미너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살려주세요, 그렇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었지만 성대가 굳어버리기라도 한 듯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습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렇게 입모양만 애처롭게 뻐끔거리던 루미너스의 목덜미에 날카로운 마취침이 내리꽂혔습니다. 바늘이 표피와 진피를 가르고 들어오는 그 찰나의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습니다. 눈앞이 흐려지고 시야에 담긴 풍경이 일그러졌습니다. 심한 현기증과 함께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루미너스는 제 오감이 서서히 둔해져가는 것을 느끼며, 달콤하지는 않지만 깊고 수렁 같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제게 곧 들이닥칠 비극을 잠시 잊고서 말이죠.

 루미너스가 눈을 떴을 때는 좁은 케이지 안이었습니다. 창고 안에는 루미너스가 들어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크기와 생김새의 케이지가 즐비하게 들어차 있었습니다. 동족의 피비린내가 진하게 배인 그 공간에는 단 한 줄기의 빛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도마 위에는 해체되다 만 짐승의 사체가 제 복강을 훤히 드러낸 채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지옥도를 방불케 하는 광경에 루미너스가 비명을 내지르자 루미너스와 마찬가지로 케이지 속에 갇힌 수인 하나가 시끄럽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철창을 내리 찍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의 두 눈 또한 루미너스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죽음에 대한 공포로 가득 들어차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루미너스는 그제야 이곳에 수용된 다른 수인들의 표정을 찬찬히 살폈습니다. 모두가 그저 무기력하고 허망한 얼굴로 케이지 바닥에 늘어져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을 기다리고만 있었습니다.

 루미너스는 그곳에서 나흘을 있었습니다. 사실 정확히 나흘을 보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저 루미너스가 갇혀있는 동안 인간이 이 창고에 모습을 드러낸 횟수가 네 번이니 나흘이 지났겠구나 지레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인간이 창고 안에 발을 딛을 적마다 케이지 속의 수인들은 어떻게든 그의 눈에 띄지 않고자 몸을 웅크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제 모습을 감춘 들 인간의 선택을 빗겨갈 수는 없었죠. 인간은 바보가 아니었으니까요.

 인간의 선택을 받은 수인은 이내 사지가 결박당한 채로 처형장이나 다름없는 도마 위에 올라야만 했습니다. 도마 근처에는 톱과 뼈칼을 비롯한 다양한 장비들이 비치되어 있었고, 그것들은 어김없이 도마 위의 수인을 가르고 헤집어 놓았죠. 복강에 가득 들어차있던 장기는 대개 바닥에 내버려졌고 스티로폼이 그 자리를 대체하곤 했습니다. 생생한 공포심으로 빛나던 눈알은 생전 그의 모습과 유사한 의안으로 대체 되었고, 벗겨진 껍질 안쪽은 유독한 냄새를 풍기는 방부제로 범벅이 되곤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더 이상 ‘그’라 지칭할 수 없어진 ‘그것’은 온몸이 파헤쳐졌음에도 불구하고 어찌어찌 봉합되어 금방이라도 멀쩡하게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모습을 하고선 다른 인간들에 의해 바깥으로 옮겨지는 것으로 그들 앞에서 영영 모습을 감추곤 했습니다. 하나의 생명이 인간의 미학을 위한 장식품으로 둔갑하는 그 모든 과정들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지켜보면서 어린 루미너스는 비명조차 제대로 내지를 수 없었죠. 그저 두 귀를 막고 두 눈을 감고선 손바닥 너머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소음들을 무시하고자 애쓰는 것이 루미너스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습니다. 인간들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저 도마 위에 오를 다음 후보가 되어버릴 지도 몰랐으니까요.

 루미너스가 이곳에 끌려 들어온 지 꼭 나흘 째 되던 날, 창고 안을 찬찬히 훑던 인간이 마침내 루미너스의 케이지 앞에 멈춰 섰습니다. 아직 죽고 싶지 않아, 도마 위에 오르고 싶지 않아, 누가 좀 도와주세요. 케이지 앞에 멈춰 선 인간이 저를 빤히 바라보자 루미너스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꽥꽥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루미너스의 바람을 들어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죠. 그의 편을 들어줄만한 이들은 모두 케이지 속에 갇혀있었으니까요.

 곧 저 도마 위에 오를 거라 생각하니 그간 나오지도 않던 눈물이 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철창을 걷어차고 발을 동동 굴러 봐도 루미너스의 앞에 선 남자는 제 발걸음을 되돌릴 기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루미너스가 계속해서 소란을 피우자, 고개를 숙여 마치 아궁이 속의 루미너스와 처음 얼굴을 마주 했을 적처럼 철창 너머로 루미너스와 눈을 마주한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루미너스에게 나지막이 속삭였습니다. 너는 죽이지 않을 거야. 그러더니 케이지를 두터운 베일로 덮고선 루미너스를 어디론가 옮기기 시작했죠.

 그리 하여 루미너스가 도달한 곳은 향긋한 장미 내음이 감도는 어느 실내였습니다. 동족의 피비린내도 풍기지 않고 따스한 온기만이 감도는 그곳에서도 루미너스는 불안감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루미너스가 나흘 간 지켜 본 바, 이제껏 온전히 살아서 창고를 떠난 동족은 단 한 개체도 없었기에 저에게도 곧 끔찍한 처분이 내려질 거라는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곳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매분 매초가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습니다. 이곳에서의 기억이 제 삶의 마지막 기억으로 남을 것만 같았습니다. 초조한 기다림 끝에 사방을 가리고 있던 베일을 걷어낸 한 소년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소년이 제 아비와 똑 닮은 얼굴을 하고선 두 손으로 철창을 붙들었을 때, 루미너스는 초 단위로 제 영혼을 깎아 내리는 듯한 두려움 속에서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소년과 꼭 닮은 얼굴의 아버지가 제 가족을 도살했던 그 날의 기억과 함께, 인간은 약자이든 강자이든, 미숙하든 원숙하든 모두 악마나 다름없다던 어른들의 가르침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팬텀, 그 아이가 멀쩡한 제 손을 희생하면서 까지 루미너스에게 다가서기 전까지만 해도요.

 루미너스가 이제껏 마주한 인간들과 달리, 그 아이는 참 다정했습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먼저 다가와 조곤조곤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가, 몇 번을 물리고 할퀴어진 탓에 상흔 가득한 팔을 뻗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는 손길이, 저를 향한 냉대에도 인정人情을 잃지 않는 눈빛이, 피비린내 풍기는 제 아비와는 달리 참 다정한 인간인 것 같아 보였습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나 체격이 자라고 좀 더 성인 남성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모한 후에도 그 본질만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죠. 우리 언젠가는 꼭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는 몇 년 째 제게 말 한 번 먼저 걸어오지 않는 루미너스를 향해 늘 그렇게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인간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만은 예외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아버지가 몇 날 며칠 자리를 비우는 날이면 그는 늘 케이지의 문을 활짝 열어두곤 했습니다. 오늘이라면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을 거라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로 루미너스의 손목을 잡아 끌고서 궁전처럼 넓은 집안 이 곳 저 곳을 탐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와 함께할 때면 이제껏 겪었던 모든 일들이 아득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언젠가 그 모든 비극을 잊고서 그와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들기도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미너스는 그에게 마음을 활짝 열 수 없었습니다. 날 적부터 깊은 산속에 숨어 지낸 탓에 제대로 된 인간 문명을 접한 적 없는 루미너스가 보기에도 고풍스러운 가구와 벽지들이 가득한 집안은 아마 수인들의 뼈와 살을 발라내어 축적한 부를 기반으로 건립한 것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거든요.

 그런 생각이 들 적마다 루미너스는 제 가슴께 어딘가에서 비롯되어 사지의 말단 신경을 지배하려 울컥울컥 몰려드는 살의를 애써 억눌러야만 했습니다. 또한, 그와 동시에 고개를 드는 진한 죄책감에 팬텀의 눈을 제대로 마주할 수조차 없었죠. 제게 조금의 의심도 없이 온정을 베푸는 팬텀의 해사한 얼굴을 마주하고서 감히 그와 그의 일족에 대한 살의를 품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으니까요.

 나중에 너랑 나랑 단 둘이 이곳에서 살게 되면 정말 좋겠다, 그렇지? 그렇게 물어오는 팬텀을 향해, 루미너스는 긍정의 의사도 부정의 의사도 표할 수 없었습니다. 루미너스와 대면하기 이전에 팬텀이 제 아비에게 그리 물었었죠. 그들이 진정으로 짐승과 다르지 않느냐고요. 그 물음을 여직 기억하고 있는 루미너스는 인간에 대한, 더 나아가 제 동족의 피와 살 위에 올라 제게 온정을 베푸는 팬텀에 대한 살의를 느낄 적마다 그에겐 차마 내뱉을 수 없는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마음속으로만 되뇌어야 했습니다.

 미안해, 나는 당신과 달리 어쩔 수 없는 짐승인가 봐.

 그렇게 마음속으로만 고요히.

 오늘은 아버지가 돌아오시지 않는 날이라며, 아침에 눈을 뜰 적부터 밤늦게까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던 팬텀의 목소리가 차차 잦아들었습니다. 편하게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면 될 것을, 굳이 불편한 자세로 케이지 앞에 웅크려 앉아 잠든 팬텀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던 루미너스가 그에게 이불을 가져다줄 양으로 몸을 일으켜 케이지 바깥으로 빠져나왔습니다.

 팬텀이 철창을 잠그지 않고 잠든 때면, 루미너스는 해가 떠오를 적까지 창틀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곤 했습니다. 몇 년 전 그의 아버지의 손에 포획된 이래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바깥의 공기가, 단 한 번도 밟아본 적 없는 바깥의 대지가 미친 듯이 그리웠던 탓입니다. 팬텀에게 이야기를 꺼내면 그는 분명 루미너스의 소망을 들어주었을 테지요. 그러나 루미너스가 팬텀에게 그 작은 부탁 하나 내뱉을 수 없었던 까닭은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를 향한 신뢰와 애정과는 별개로 루미너스의 이면에 철저하게 각인된 인간에 대한 살의,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지독한 죄책감. 팬텀이 여직 눈치 채지 못한 그것은 한 때 팬텀과 루미너스를 가르고 있던 철창보다도 더 견고한 방벽으로써 그 둘의 사이를 가르고 있었던 겁니다.

 오늘도 루미너스는 창틀에 기대어 앉아 바깥을 내다보았습니다. 창문 너머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달빛이 시리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얇은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와는 단절된 바깥세상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면 언제나 벅차오르곤 했던 충동이 오늘따라 루미너스의 이성에 진득하니 달라붙어 악마 같은 속삭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잠깐만 나갔다 오는 건 괜찮지 않을까? 팬텀이 깨기 전에 돌아오면 되잖아. 아무도 보는 사람 없어. 지금이 기회야. 루미너스의 시선이 반쯤 열린 문틈 새를 향했다, 바닥에 웅크려 앉아 노곤히 잠든 팬텀을 향했다가를 반복하다 이내 문틈 새에 고정되었습니다.

 잠깐이면, 잠깐 나가 바깥 공기만 맡고 돌아오는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

 행여나 팬텀이 깰까, 발소리를 죽인 채 조심스레 문가로 다가 선 루미너스가 방문을 밀어 열었습니다. 별 저항 없이 스르르 열린 문 너머로 그의 아버지가 없을 적마다 팬텀과 가끔씩 거닐곤 했던 길고 광활한 복도가 펼쳐졌습니다. 어둠에 먹혀 끝자락이 보이지 않는 복도를 걷고 또 걷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땐 본인이 나섰던 팬텀의 방이 어디쯤이었는지 조차도 가늠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마치 그곳으로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이.

 그러나 루미너스가 복도의 끝자락에 도착하자마자 그러한 불안감은 이내 씻은 듯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이곳에서 지낸 이래 단 한 번 제게 허락된 적 없었던 금단의 공간으로 향하는 계단이 루미너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저택의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이요.

 그의 아버지가 있을 적에는 물론, 없을 적에 조차도 감히 내려가 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1층을 향해 루미너스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아래층의 마룻바닥이 가까워질 적마다 심장이 그 박동에 힘을 더해갔습니다. 그러다 루미너스가 현관문의 문고리를 잡았을 적에는, 어쩌면 방에서 곤히 잠들어 있을 팬텀의 귀에 까지 이 소리가 닿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죠. 몇 년 만에 나가보는 바깥세상에 대한 기대감과 공포, 이대로 팬텀에게 들킨다면 두 번 다시는 그의 다정한 얼굴을 마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엉망진창으로 배합되어 기묘한 희열감을 자아냈기 때문입니다.

목이 타들어갈 정도의 강렬한 긴장감이 문고리를 잡은 루미너스의 손등 위에 무겁게 얹어졌습니다. 이에 문고리가 조금의 마찰도 소음도 저항도 없이 부드럽게 돌아가고 나자 루미너스의 눈앞에 생생히 펼쳐진 것은 루미너스가 그간 그토록 갈구해왔던 바깥세계의 풍경이었습니다. 발걸음을 옮길 적마다 발밑에서 사부작사부작 바스러지는 흙의 메마른 감촉, 시리도록 찬 겨울 밤공기, 벽으로 막히지 않아 탁 트인 사방과 끝을 모르고 높은 어둔 천장. 한때는 욕망의 대상이었던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루미너스 내면의 또 다른 욕망을 부추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달음질 한다면 다시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내면의 욕망을.

 그러나 루미너스는 차마 너른 정원을 지나 대문 밖으로 발을 내딛을 수 없었습니다. 팬텀의 다정함과 달달한 장미향에 가리어 그간 잊고 있었던 동족의 진한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문득 코끝을 스쳤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감각이 기억을 되살리는 트리거가 되기도 하는 법이죠. 그 역겨운 혈성으로 하여금 루미너스의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 난 것은, 저와 함께 어둡고 좁은 창고에 갇혀 매일 같이 죽음을 목도하고 또 기다리던 동족들의 무기력한 모습이었습니다. 지금도 집안 어딘가 창고에서 무게모를 짙은 절망에 짓눌려있을, 동족들의 무기력한 모습이요.

 홀린 듯 공기 중의 피 냄새를 따라 나선 루미너스가 이내 도달한 곳은 두터운 철문으로 가로막힌 거대한 창고 앞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은 잠겨있지 않았죠. 내부의 수인들이 모두 케이지에 갇혀 있으니, 제 아무리 철두철미한 그의 아버지라도 굳이 창고 문을 잠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창고의 문이 열리자마자 케이지 안에서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던 수많은 동족들이, 그들만이 감지할 수 있는─루미너스로부터 풍겨오는 익숙한 동족의 체향에 하나 둘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수 개의 눈동자가 온전히 루미너스만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루미너스의 시선은, 창고 속에 갇혀 제 처분을 기다리던 그 때와 마찬가지로 사지의 껍질이 벗겨진 채 제 안의 힘줄과 근육을 온전히 드러낸 동족이 까무러져있는 도마 위를 향해있었죠. 루미너스가 팬텀의 다정함에 취해 수년을 그리 안락하게 살아가는 동안, 그의 아버지는 루미너스가 이제껏 봐온 것보다도 더 많은 수의 수인들을 무참히 살해했을 그 도마 위를. 아무 죄 없는 팬텀을 배신할 수 없다는 일념 하나로 꾹꾹 억눌러 왔던 지독한 정념이 루미너스의 내면에서 더는 제어할 수 없을 것만 같이 강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밤 루미너스는 팬텀의 방 안, 제 안락한 감옥 속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저와 제 가족들과 같은 비극을 목전에 둔 동족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금 되살아 난 끔찍한 증오에 먹혀 팬텀을 기억해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창고의 문을 닫고서 그 안에 숨어든 루미너스는 동족들이 갇힌 케이지의 문을 하나하나 열어젖히며 제 불타는 살의를 화려하게 터뜨릴 순간만을 고요히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살의가 향하고 있는 대상은 아주 명백했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제 피가 섞인 형제들을 처참히 도륙한 사람. 루미너스가 증오함과 동시에 신뢰하고 애정한 단 한 명의 인간, 팬텀과 꼭 빼닮은 외모의 중년 남성. 그의 유일한 피붙이이자 부친.

 어리고 무력했던 그때와 달리, 이제는 창고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저 살려달라며 애원하는 그의 목을 물어뜯고 시체의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어 발겨놓을 그 순간만이 미친 듯이 기대될 뿐이었습니다. 그들을 인간과 구분 짓는 유일한 기질, 그러나 루미너스가 줄곧 잊고 지내왔던 야성이 맹렬한 살의와 함께 루미너스의 사지를 지배한 것이었죠.

 마침내 동이 텄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제 동료들과 함께 돌아와 창고의 문을 열어젖힌 순간, 루미너스는 살아생전 처음으로 제 정념에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온 얼굴이 타인의 뜨끈한 혈액으로 젖어 들어가는 낯선 감각, 손톱이 타인의 피부조직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유쾌한 촉각, 인간과 이성─저를 억압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감. 갇혀있던 수인들이 그 모든 것들을 터뜨려내고 남은 자리엔 이 집안에서 일하던 사용인들을 비롯한 인간의 시체만이 즐비했습니다. 수인들의 시체 탑 위에서 그 녹물을 받아먹고 살던 기생충 같은 인간들의 시체만이요.

 그 녹물을, 받아먹고 살던.

 거기까지 생각이 와 닿자 잊고 있었던 얼굴 하나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었던, 다른 인간들과는 달랐던, 끔찍한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잠시나마 저를 구원할 수 있었던, 그 아이. 저를 잠식했던 모든 분노를 토해내고 마침내 깨어난 이성이 불안감과 죄책감으로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팬텀의 체향을 좇아 바닥에 즐비한 사체들을 넘어 2층으로 향하는 동안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이고 넘어질 뻔 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있을 적에는 단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그의 이름을 몇 차례나 애타게 불러 보아도 그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습니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거세게 뛸 적마다 이제껏 루미너스가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두려움이 루미너스의 사지를 맹렬하게 강타했습니다. 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타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동족의 사체를 목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인간의 사체를 목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루미너스가 품은 두려움의 정체였습니다.

 루미너스가 팬텀의 체향이 진하게 느껴지는 곳으로 한 발 한 발 걸음을 내딛을 적마다 제 몸집을 부풀려가던 지독한 공포는 이내 실내에 울려 퍼진 강렬한 총성과 함께 그 팽창을 멈추었습니다. 총성은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총성이 울릴 적마다 진하게 더해진 피 냄새가 물감을 덧칠하듯 공기 중에 섞여 있던 팬텀의 체향을 뒤덮었습니다. 그것은 동족의 피 냄새였습니다. 루미너스가 창고에서 수없이 맡아온, 그의 부친의 손끝에 늘상 배어있던, 진한 동족의 피 냄새.

 한 때 루미너스가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다 생각했던 그 방의 문이 활짝 열려있었습니다. 그리고 문 앞 복도에 켜켜이 쌓인 사체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지요. 총성이 잦고 정적만이 감도는 복도에 문득 누군가의 발소리가 울렸습니다. 발소리는 루미너스의 등 뒤에서 멈춰 섰습니다. 이내 장전음이 들려왔습니다. 루미너스는 아직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제 뒤에 선 그가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음성에 뒤엉킨 감정은 루미너스에 대한 배신감이었을까요, 후회였을까요, 아니면 수인을 믿은 제 자신에 대한 환멸이었을까요. 사실 루미너스는 그 음성에 담긴 팬텀의 감정을 감히 읽어 내릴 수 없었습니다. 비겁하게도, 지금의 팬텀을 뒤덮은 그 모든 괴물 같은 정념들이 저로 인해 촉발되었다는 사실을 직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인의 피를 뒤집어 쓴 팬텀이, 마찬가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간의 피를 뒤집어 쓴 루미너스와 눈을 마주했습니다. 샌님, 루미너스, 왜 끝까지 대답이 없어. 그리 물어오는 어투가, 언제나와 같이 루미너스의 대답을 갈구하는 그 목소리가 참 다정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 아비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감정의 고저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음성이었죠.

 그리고, 다시 한 번 총성이 울렸습니다. 격발음과 함께 바닥에 쓰러진 루미너스가 다리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습니다. 루미너스의 앞에 쭈그려 앉은 팬텀이 그의 입안에 총구를 물리고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머리채를 사정없이 휘어잡아 들어 올렸습니다. 한 때는 루미너스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었던 그 손길에, 이제는 상대에 대한 조금의 인격적 존중도 담겨있지 않았습니다. 색이 다른 두 개의 눈동자, 그 속에 비친 색이 다른 두 개의 세계가 두려움으로 잘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꼭 팬텀을 처음 마주했던 그 순간처럼. 꼭 아궁이 속에 웅크려 앉아 그의 아버지와 눈을 처음 마주했을 적처럼.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루미너스.”

“…….”

“이제는 당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지 잘 알겠으니까.”

 그들이 정말 짐승과 다르지 않느냐는 팬텀의 물음에 아버지는 이 아이가 네 물음에 대한 답이 되었으면 좋겠다, 답했었죠. 아무래도 팬텀은 이제서야 루미너스를 통해 아버지가 원하는 해답에 다다른 모양입니다. 그가 예상했던 그림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3.

 

 팬텀의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수인은 멍청한 짐승과 같아, 맞아야만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고요.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가르침이 꼭 옳지만은 않았던 모양입니다. 가죽 채찍이 살갗을 터뜨리고, 차가운 쇠사슬이 숨통을 조여오고, 뜨끈하게 달궈진 인두가 사지를 지지는 순간에도 루미너스는 결코 팬텀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거든요. 당신의 아름다운 그 두 눈동자로 저를 단 한 번만 다시 바라봐 달라 절규인지 애원인지 모를 명령을 기계처럼 반복하는 팬텀의 눈을.

 팬텀은 그 어떤 방법을 써도 두 번 다시 저를 바라보지 않는 루미너스에게 실망하고 또 절망했습니다. 한 때는 종의 차이를 넘어 깊은 감정의 교류를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상대가 저를 배반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 모든 죄를 덮어주겠노라 이야기하는 제게 차가운 이를 드러내니, 한 때는 두 번 다시 루미너스를 보지 않을 양으로 그를 드넓은 창고 안에 가두어 놓고 오랜 시간 그의 대체재를 찾아 떠난 적도 있었습니다. 눈처럼 하얀 머리칼에 색이 다른 두 눈동자를 가진, 루미너스와 꼭 닮은 외양이지만 루미너스와 달리 저를 품어줄 존재. 팬텀은 그들을 찾아 헤맸습니다.

 팬텀은 그들에게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때로는 루미너스와 처음 마주했을 적에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다정하게 다가서기도 했고, 때로는 아버지가 수인들을 대할 적에 그러했던 것처럼 엄하게 매를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팬텀이 그 어떤 방법으로 그들에게 다가선들 그들은 그를 그저 증오와 두려움의 대상으로서만 여길 뿐 그에게 먼저 다가서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그 누구도 루미너스만큼 아름답지 못했죠. 그 누구도 루미너스를 완벽하게 대체할 수는 없었던 겁니다.

 기나긴 방황 끝에 팬텀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간만에 루미너스가 갇혀 있던 창고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해 뼈만 앙상한 몰골로 더러운 창고 바닥에 늘어져있는 루미너스의 몸을 두 번 다시 놓지 않겠다는 듯 꼭 끌어안으며, 집착에 물들어 완벽하게 변질된 사랑의 고백을 속삭였죠.

 나는 당신이 아니면 안 돼.

 차갑고 축축한 창고 안에서 인간에 대한 증오나 복수심을 곱씹을 틈마저도 주지 않는 지독한 무력감에 짓눌린 채 죽음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루미너스가, 다시 한 번 제 사지를 움직일 동인을 되찾은 것은 바로 그 순간 이었습니다. 팬텀의 환심을 산다면 내게 다시 한 번 본래의 터전으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그를 향한 증오를 다시 한 번 표출할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괴물 같은 희망이 루미너스의 내면에서 고개를 들었거든요.

 그래서 루미너스는 다시금 팬텀의 눈을 마주하기로 했습니다. 그가 피비린내 나는 그 손으로 제 뺨을 쓰다듬는 것을 허락키로 했습니다. 그의 아비의 숨통을 끊어놓았던 주둥아리를 열어 거짓고백을 늘어놓기로 했습니다. 그 때는 미안했다고, 사랑한다고, 다른 모든 인간들을 증오할지라도 당신만은 증오하지 않겠다고. 그의 어깨너머 빼곡히 들어찬 케이지 속, 저와 닮은 외양의 동족들이 하나 둘 박제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말이죠.

 스스로의 목에 목줄을 감고선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소유욕으로 변질된 애정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과 증오를 억누른 채 세 치 혀로 거짓된 사랑을 속삭이는 일, 그 양자로만 구성된 하루 24시간은 시커먼 구정물을 꾸역꾸역 삼켜내는 것만큼이나 역했으나, 루미너스는 그 날 밤 맡은 겨울 밤공기를 다시 한 번 폐부 깊이 들이 마실 그 순간만을 기약하며 근근이 식도를 옥죄어 매는 눅진한 구역감을 참아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언젠가 그의 목에 꽂아 넣을 송곳니를 감추고선 짐승 같은 감으로 빈틈을 노리며 루미너스는 길들여진 맹수의 모습을 연기하고, 또 연기했습니다. 영원한 자유를 위하여. 또, 혐오스러운 그의 대를 끊기 위하여.

 그리고 마침내 때가 찾아왔습니다. 그의 품안에 안겨 충실한 개새끼라도 된 양 굴어야 했던 길고 긴 인고의 시간이 탐스러운 결실을 맺을 때가요.

 팬텀을 향한 기나긴 순종 끝에 불신의 상징이었던 족쇄가 풀린 순간, 그간 감추어 왔던 날카로운 짐승의 송곳니가 그의 팔을 파고 들었습니다. 루미너스는 제 입안으로 여과 없이 울컥울컥 쏟아져 들어오는 그 비린 향의 체액에 환희를 또 감격을 느꼈습니다. 근육이 짓이겨지는 고통에 굳은 그를 바닥에 쓰러뜨리고선 그의 몸 위에 올라탄 루미너스가 짐승같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 때는 여름의 일광보다도 찬란한 미소를 지울 줄 알았던, 그러나 곧 혈기를 잃고 박제된 제 동족들이 그러했듯 하찮은 정물로 전락할 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습니다. 마치 심판자라도 된 것처럼 말이죠.

 종의 차이에서 비롯된 압도적인 완력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팬텀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루미너스의 아래에서 무의미한 저항을 이어나가는 대신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어쩌면 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될지도 모를 이 장면을 망막에 하나하나 담아내길 택했죠. 방을 가득 메운 케이지, 그 속에서 저를 바라보는 수십 개의 오드아이, 그 한가운데에서 저를 향한 증오를 여과 없이 표출하고 있는─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짐승 한 마리, 그 모든 광경을.

 팬텀의 손이 루미너스의 뺨에 와 닿았습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처럼 흰 피부위에 물든 인간의 붉은 피는 기름때처럼 아무리 문질러도 깨끗이 닦이질 않았습니다. 어서 저 인간의 목을 물어뜯으라고, 저 자의 근육을 가르고 혈관을 찢어 제 아비와 같은 모양새로 철저히 징벌하라고 부추기던 지독한 짐승의 본성이 그 손길 하나에 차차 제 목소리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수인의 피를 뒤집어썼던 그 날 밤 완전히 잃은 줄로만 알았던, 루미너스가 인간에 대한 증오를 잠시나마 잊을 정도로 사랑했던 그 다정함이 그의 손 틈새에 여전히 스며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생각 나지 않아, 샌님?”

“……손대지 마.”

“꼭 아버지와 같은 결말이네. 그 때의 나는 당신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 몰랐을 테지만.”

 그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꼭 어릴 적과 같았습니다. 두려움에 잠 못 이루는 루미너스의 곁에서 밤늦게까지 동화를 읊던, 사랑을 속삭이던, 꿈결 같은 목소리. 그 음성이 루미너스 내면의 망설임을 일깨웠습니다. 어쩌면 그가 제 손에 묻은 피를 씻어내고선 다시 한 번 그 때의 순수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그 목소리를 몰아내기 위해 루미너스가 절규하듯 외쳤습니다. 시끄러워. 듣고 싶지 않아. 나는 당신의 아버지를 증오하고, 당신을 증오해. 당신의 손아귀에서 풍기는 역겨운 피 냄새를 경멸해. 루미너스가 그리 외치며 양손으로 숨통을 조여오자 이내 루미너스의 뺨에 닿았던 손이 힘없이 떨어졌습니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시야가 가물가물해지는 그 순간까지 팬텀의 시선은 올곧게 루미너스만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제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상대에 대한 악의와 애정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돛을 잃은 배마냥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의 두 눈동자를요.

 팬텀의 목을 조여오던 루미너스의 손이 힘없이 미끄러져 내렸습니다. 도저히 이 두 손으로 그를 해할 수가 없어서였습니다. 루미너스는 그를 증오했기에 사랑할 수 없었지만, 바꾸어 말하면 그를 사랑했기에 증오할 수 없기도 했습니다. 어중간하게 섞여 든 감정의 색깔은 사랑이라는 말로도, 증오라는 말로도 감히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혼돈이라는 말 이외에 그것을 정의내릴 단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순간 시야가 뿌옇게 번졌습니다. 눈물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마치 가위에라도 눌린 듯 거부할 수 없는 탈력감과 함께 팬텀의 몸 위로 무너져 내린 루미너스가 그제야 제 목 언저리에 둔하게나마 느껴지는 이물감에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으려 드는 고개를 겨우 들어 팬텀을 바라봤습니다. 지독한 현기증과 함께 사지의 감각이 서서히 멀어져만 가는 느낌, 루미너스는 이 감각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 얼굴을 보고서도 끝까지 망설이지 말았어야지.”

 루미너스의 목덜미에 꽂힌 마취침을 뽑아내고선 상체를 일으킨 팬텀이 제 몸에 기대어 축 늘어진 루미너스의 뺨에 입맞춤했습니다. 사실 반쯤 물에 잠긴 의식으로는 그의 입술이 닿았는지 닿지 않았는지도 제대로 분간이 가지 않았습니다. 시야가 점차 어둠으로 물들었습니다. 촉각이 무뎌져 뺨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이제는 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꺼지지 않은 것은 청각이었습니다. 의식이 완전히 수몰되기 직전, 루미너스는 그의 속삭임을 분명히 들었거든요.

“이제는 확실히 알겠어, 당신이 멍청한 짐승이라는 사실을.”

 끝내는 완전한 악마로 변모한, 그의 목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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