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iolet rose
w. 모카빵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말과 함께 곁들어진 것은 다정했던 한때의 키스 대신 집착이 섞인 차가운 보랏빛이었다.
***
성스러운 신의 성소라고 자부되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죽음을 상징하는 까마귀들만이 떼 지어 앉아있었다. 본연의 색을 내지 못하는 깨진 스테인드글라스와 우는 듯한 소리를 내는 겨울의 찬바람은 성당의 아름다움 대신 괴이한 느낌을 자아낼 정도였다. 순백색을 자랑했던 신전은 피로 물든 채 검붉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불쾌하군, 난자된 말라비틀어진 검붉은 색도, 질척하고 더러운 악취 사이에서의 익숙한 혈 향도. 심사가 뒤틀리는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늘 팬텀에게 소중한 존재는 갑작스럽게 떠나가곤 했다.
굳게 닫힌 철문을 열었다. 문과 평소 사제들이 기도하던 예배당은 거리가 꽤 되었다. 그 때문에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지체된다며 자주 투정을 부리곤 했었다. 늘 유지하던 여유롭던 표정이 굳어지고,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위험했다.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그를 되돌릴 수 없었다.
소란이 일어났을 당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살기 바빠 신전을 버리고 급하게 떠났지만, ‘루미너스’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신부님다운 행동이었다. 희생만을 강요당하며 살아 저 자신은 제대로 챙기는 법을 모르는 루미너스 다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예배당의 문고리를 돌렸다. 반쯤 깨진 스테인드글라스의 불완전한 빛을 한 몸에 받는 그가 시야에 들어왔다. 늘 깨끗한 상태를 유지했던 신부복은 어울리지 않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그를 일으켜 안았다.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 온기를 잃은 신체. 그를 안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힘없이 축 늘어져 팬텀의 가슴에 괴이한 각도로 꺾인 루미너스의 고개가 떨어졌다. 마르지 않는 핏방울이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인정하고 싶지 않던 현실과 비참함이 잔인하리만큼 밀려들었다.
“신부님…. …루미너스.”
물기가 섞인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돌아오는 대답 없이 공허한 신전 안에서 쓸쓸하게 흩어졌다. 부드러운 손길로 차가워진 뺨을 쓰다듬어도 마주잡아 오는 손은, 허리를 껴안아도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는 루미너스는 더 이상 없었다. 그러게, 믿지 말라고 했잖아. 대답이 돌아오지 못할 말을 건네며 팬텀은 루미너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억눌린 허탈한 웃음이 엉망으로 쏟아졌다. 보지 않아도 선명했다. 마지막까지 이기심을 숨긴 검은 손을 뻗어오는 사람들을 끝까지 믿었을 네가 너무 뻔했다.
팬텀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말라붙은 피로 더러워진 순결의 상징이 거칠게 찢어졌다. 새하얀 목이 드러났다. 사랑해, 루미너스. 귓가에 흘리는 듣지 못할 슬픈 고백을 마치고, 하얀 목에 짧게 입을 맞췄다. 네가 원하지 않아도. 널 이대로 놔줄 수는 없지. 차갑게 빛나던 보랏빛의 눈동자는 사라지고 짐승 같이 찢어진 동공을 가진 핏빛의 눈동자만이 빛났다.
***
검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살기 위해 짐승 같은 괴성을 내지르며 도망을 가던 사람들은 광기 어린 자의 눈동자를 마주한 것을 마지막으로 바닥으로 힘없이 곤두박질쳤다. 누군가는 신을 부르고, 애원하며, 울컥울컥- 새어 나오는 미지근한 액체에 공포감을 느껴 다가오는 죽음에 도망을 갔던. 붉은 달이 떠오른 날에 순식간에 일어난 참상이었다. 한때,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다른 이를 배척했던 자들은 결국 이기심으로 인해 더럽게 물들었다. 신이 아끼는 자를 해쳐 죄의 대가로 아무런 신의 비호를 받지 못한 채로.
허영심으로 가득 찬 신전이 그에 맞는 더러운 모습을 되찾고 나서야, 광기 어린 핏빛은 차가운 보랏빛으로 돌아왔다. 이미 살아있는 자들의 숨결은 남아있지 않고 황량한 바람만 빈 신전을 채웠다. 아직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사방에서 풍기는 질척한 악취가 거슬렸다.
이성을 잃고 사냥을 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누군지도 모를 상대의 목에 이를 세워 흡혈하는 것은 오히려 팬텀에게 불쾌한 행위였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흡혈은 최소화했었다. 형제님. 익숙한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하,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느 순간부터 그 무뚝뚝한 얼굴을 찾아가는 것이 익숙한 일이 되어있었다. 이래서 인간과는 다시는 엮이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인간은 너무 쉽게 사라지는 존재였다. 원하는 것은 쉽게 얻어왔었기에 팬텀에게 잃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장갑에 질척하게 묻은 피가 예민함을 자극했다. 장갑을 거칠게 벗어내 바닥으로 버려도 불편감은 사라지질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답지 않게 꼬리를 무는 지독한 생각이 이어졌을 때부터. 거슬려 숨겨두기만 했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다. 대륙 끝자락에 위치한 시골 마을, 작은 성당에서 만났던 신부님.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팬텀의 시선을 이끌었었다. 잘 다려 입은 까만 신부복, 반짝이는 은발, 새하얀 피부. 스스로 빛을 내는 하나의 아름다운 보석 같았던 그는 보석을 탐하는 팬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주님께 기도를 드리러 방문하셨습니까. 무덤덤한 목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던 신부가 일어서 팬텀을 바라봤다. 그와 어울리는 순결한 푸른 두 눈동자와 시선이 닿았다.
“또 여기에 있지.”
동그란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시선에 팬텀은 기분 좋게 웃으며 루미너스의 옆에 자리했다. 원래 제 자리였던 것 마냥 뻔뻔한 모습에 루미너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또 언제 몰래 들어온 거냐. 보고 싶어서 왔지. 허리를 껴안는 손길에 이런 식의 접촉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루미너스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돌렸다.
“신부님은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
“무슨 소리를. 연구에 방해되고 불편해, 빨리 놔."
신부님답기는. 말은 그렇게 했어도 끌어안는 손길이 싫진 않은 듯 팬텀의 품에 몸을 기대는 모습이 귀여웠다. 가랑비에 땅이 젖듯 익숙하지 않은 감정을 여는 것은 시간이 걸렸다. 말하지 않아도 가끔 보이는 눈빛이나 머뭇거리는 행동을 보면 루미너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히 보였다. 루미너스는 감정을 숨기는데 미숙했고, 팬텀은 사람의 감정을 꿰뚫어 보는 데에 익숙했다. 하지만, 뭐- 루미너스의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손쉽게 얻는 방법은 있겠지만, 내가 그렇게 한다면 네가 싫어하겠지.
간지러운 듯 품 안에서 조금씩 발버둥 치더라도,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너를 보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네가 적응할 수 있게. 하지만, 언젠가 너에게 계속 숨겨왔던 내면의 공포심이 드러날 때가 온다면.
그랬던 때도 있었다. 팬텀은 감고 있던 눈을 느리게 떴다. 이전의 다정했던 날들은 전날의 달에 물든 밤하늘과 함께 조금씩 고개를 내미는 태양에 가려져 사라지고 있었다. 까만 구름이 천천히 산 너머로 움직였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곧, 죽은 듯 곤히 잠들어있던 자가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
넓은 창을 통해 밝은 빛이 쏟아졌다. 시릴 정도로 거슬리는 밝은 빛이 곤히 잠들어 있는 루미너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 다가갔지만, 아직 그에겐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는지 작은 미동조차 없었다. 슬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눈을 뜨면 답지 않게 당황해 하는 루미너스의 모습을 보는 것도 꽤나 큰 재미일 것 같아 팬텀은 그의 옆에 몸을 눕혔다.
부드러운 하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다 둥근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이마에서 턱까지 타고 내려오며 짧게 입맞춤을 하던 중 하얀 어깨에 남은 작은 이빨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손 끝으로 작은 상처를 매만졌다. 상처는 곧 사라지겠지만, 그 본질은 영원히 네게 남게 되겠지. 신의 부름을 받지 못한 ‘신부님’ 은 눈을 뜨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팬텀은 더 이상 루미너스의 뜻대로 그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네가 쓸데없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네가 마음대로 할 수 없게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선물을.
어느새 손끝 아래의 작게 남은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상처하나 남지 않은 매끈한 어깨를 매만지던 팬텀의 입술이 호선을 그었다. 이제 시간은 충분했다. 사파이어를 닮은 눈동자와 낯익지 않은 루비를 닮은 눈동자가 몽롱한 빛을 띠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팬텀은 차가운 첫 숨을 내뱉는 루미너스를 놓칠세라 품 안에 꼭 껴안았다. 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은 뻔하지. 미처 식지 못한 사랑은 누군가에게는 독이 되어 다시 찬란하게 피어났다. 이맘때 쯤, 화사하게 만개하는 아릿한 보랏빛 장미 향기처럼.
아름다운 신부님에게는 ‘영원한’ 아름다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