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NAPATY
w. LESS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것을.
팬텀이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이었다. 그것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해선지 아니면 늘 그렇듯 장난기 가득한 농담인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팬텀이 그 말을 해올 때마다 나는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상극을 달리는 성격 탓에 그를 결코 맘에 든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특유의 직감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고유의 능력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역린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헛소리라니. 흥얼거림 같은 마디마디를 들을 때마다 차갑게 쏘아붙였지만, 궁지에 몰려 진퇴양난의 상황이라도 그 말이 들리기만 하면 마법처럼 긴장이 풀어지는 것이 못내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팬텀이 마냥 가볍기만 한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적어도 그가 그런 거만한 말-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을 하는 건 해결책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 열쇠를 쥐고 있는 건 팬텀이었다. 그것은 내가 팬텀에게 가지는 동료로서의 믿음이자 유대감이기도 했다. 화려한 페르소나를 쓰고 백금 슈트를 입은 채 전장을 누비는 모습이 까마귀 같았다.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은, 대륙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누비는 한 마리의 새.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고 아무에게나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점 또한 내 생각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런 그가 세계를 구하는 데에 앞장서는 이유라면 사랑했던 이의 부탁이자 신념을 지키고자 함이었다. 까마귀는 그 어떤 동물보다 계산적이고 영악하며 주변의 패들을 아낌없이 사용할 줄 아는 지략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를 믿지 못했다. 하늘이 깊어 무수한 별들마저 어둠에 삼켜졌을 즈음 숲속 구석에 자리한 작은 집에 찾아와 붉은 장미를 내밀 때마저도 말이다. 새벽에 무슨 일이냐며 묻는 내게 그는 말 대신 꽃을 흔들어 보였다. 안 받아? 선물인데. 필요 없어.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에 경계를 풀지 않자 팬텀이 예의 그 장난스러운 얼굴로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샌님은 역시 샌님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아니야. 난 그런 샌님이 좋은 거니까. 손에 들려있던 장미를 내 책상에 놓여있던 화병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좁은 주둥이에 가시가 제거된 매끄러운 줄기가 미끄러지듯이 착지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선물이니까 받아줘. 늘 그랬듯 여유를 잃지 않은 한 마디를 남겨놓고는 거절할 새도 없이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이런 류의 감정에 무지한 나라 해도 이 시간에 찾아온 이유는 명백했다. 그가 떠나간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겼다. 꽃은 붉고 탐스러웠으며 생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마치 팬텀처럼. 고개를 숙이자 매혹적인 향이 코를 찔렀다. 나는 꽃을 꺼내는 대신 장미가 자리를 차지한 탓에 구석으로 몰린 시든 프리지아를 거두었다.
ANAPATY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모래가 까슬까슬했다. 사막의 낮은 그 어느 지역보다 맹렬했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에 머리와 상체에 두르고 있던 천을 내리눌렀다. 이곳을 지나가는 대부분은 낙타를 타고 이동하지만 걸어간다면 대략 일주일 정도가 걸릴 터였다. 어깨에 둘러있는 가방끈을 다시 한번 단단히 동여맸다. 소가죽으로 만든 반달 모양 가방은 어떤 걸 담아도 괜찮을 정도로 질기고 튼튼했다. 오랜만의 모험이었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나의 일생은 유년기를 거치면서부터 모험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사막의 열기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는 나와 달리 팬텀은 금세 익숙해진 눈치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천을 두른 팬텀의 주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흐려지는 시야에 눈을 가늘게 떴다. 팬텀이 희미해졌다 제 모습을 되찾았다. 샌님?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괜찮아? 걱정 어린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자들에게 있어 사막은 죽음의 땅이다. 황량한 대지와 뜨거운 열기는 숨통을 움켜쥐고 미칠듯한 건조함과 메마름은 폐를 짓눌렀다.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겨도 눈을 들어 저 너머를 바라봐도 보여지고 남겨지는 것이 없으니 망각의 땅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니할 사막은 오시리아 대륙 유일의 사막으로 뜨겁고 건조한 기후 탓에 유목민들이 모여 만들어진 아리안트와 연금술사들의 마을 마가티아를 제외하고는 몬스터들이 일대를 지배하는 황무지가 되었다. 그 때문에 외지인들의 출입이 쉽지 않아 아리안트 사람들에게는 여행객이 방문하면 고난을 뚫고 왔다는 것에 수고했다는 뜻으로 정성을 다해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다. 비록 왕비의 폭정으로 외지인들에 대한 배외심이 강해져 없어졌다고 하지만 거리를 지나가던 중 낯선 소녀에게 받은 옥빛 돌을 보고 있자니 아주 사라진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팬텀은 과거에 대한, 그러니까 괴도 팬텀이 되기 이전의 일들을 입에 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팬텀이 아리안트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본인의 입이 아닌 추측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팬텀에게 물었을 때 부정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쉽게 긍정하는 모습에 허무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제게 스스럼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과거에 대해 더 물어볼까 했지만 고민 끝에 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혹시나 과거에 있었던 일을 꺼냄으로써 그의 기분이 상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스승인 괴도 레이븐과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랑을 했는지. 궁금한 것 투성이였지만 나는 입을 열어 묻는 대신 침묵하는 것을 택했다. 우리에게는 과거에 집착하는 것보다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옳았다. 비록 지금의 그를 만드는 데에 있어 과거의 편린들이 많은 영향을 끼쳤을지언정 말이다.
그러던 찰나 팬텀이 제안한 사막으로의 여행은 뜻밖의 것이었다. 사막에 가고 싶어. 창백한 얼굴이 한자한자 천천히 단어들을 내뱉었다. 무던한 나와는 달리 깔끔하고 까다로운 성정 탓에 험한 곳을 좋아하지 않던 이였다. 커다란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잘 만들어진 밀랍 인형 같았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고향에 가고 싶어. 만류하는 집사와 메이드들을 뒤로 한 채 우리는 짐을 챙겼다. 오랜만에 침대에서 나와 두 발로 서 있는 모습이 들떠 보였다.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이 사막을 다 건널 수는 있을까. 모든 게 미지수였다. 낙타를 타지 않고 걸어 이동하겠다는 말에 다시 한번 모두가 말렸지만, 팬텀은 확고했다. 나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끝맺음의 여부조차 확실치 않은 여행이었다. 그는 늘 자유를 갈망했고 사랑했다. 방에 갇혀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건 괴도 팬텀답지 않은 결말이었다. 몇 시간을 이동한 탓에 갈증이 일었다. 허리춤에 찬 물병을 들어 뚜껑을 열었다. 목을 축인 뒤 그에게 내밀자 희고 긴 손가락을 가진 커다란 손이 내 손을 감싸 쥐었다. 부드럽게 위아래로 유영하는 목젖을 보다 그의 손을 떼낸 뒤 뚜껑을 닫았다. 그의 시선이 내게로 와 닿았다. 쪽빛의 눈은 예전처럼 활기를 띠지도 장난기를 비추지도 않았지만 애틋함만은 여전했다.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모래알 같은 빛바랜 머리칼이 이마에 닿았다. 천천히 감기는 긴 속눈썹을 보다 눈을 감았다.
사막의 밤은 냉혹하다. 뜨거우리만치 온도가 치솟는 낮과는 달리 해가 지면 급격하게 가라앉기 시작한다. 한기에 몸을 움츠렸다. 모래 사이에 깊숙이 묻혀있던 나뭇잎들을 긁어모아 불을 붙이자 푸른빛을 띠던 이파리가 불그스름하게 타올랐다. 오늘은 여기서 자야 할 것 같네. 불이 꺼질까 봐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뒤적이는 팬텀의 옆에 앉았다. 바람결에 따라 얼굴이 노랗게 물들었다가 제 색을 되찾았다. 별들로 가득 찬 하늘이 어렸을 때 오로라에서 봤던 천문학책 귀퉁이에 그려져 있던 밤하늘 같았다. 예쁘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어깨에 무언가가 기대오는 것이 느껴졌다.
“너한테 꼭 보여주고 싶었어.”
이런 방식으로 보여주려던 건 아니었지만 말이야. 그 어느 곳에서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엘리니아에서도. 그란디스에서도. 하다못해 아케인리버에서도. 구름 한 점 없는 남색 하늘에 커다랗게 뜬 초승달을 중심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뿌려진 보석들이 저마다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렸을 땐 별이 갖고 싶었어.”
모든 걸 다 훔칠 수 있다는 늙은이도 별만은 훔치지 못한다고 했거든. 나는 늙은이를 뛰어넘는 대괴도가 되고 싶었어. 뭣 모르는 애송이라 가능했던 패기였지. 내 사전에 최고가 아니면 노력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고, 늙은이에게 모든 배움을 터득한 후 별 이전에 세상이 인정하는 보물을 훔치기로 마음먹었지, 그게 스카이아였어. 당시에 에레브의 보물이라는 소문이 돌았었으니까.
알고 보니 평범한 장신구였지만 말이야. 몸을 감싸는 공기가 차가웠다. 팔을 들어 모닥불을 향해 꽉 쥐고 있던 손을 폈다. 굳은살이 여기저기 박혀 거친 손바닥이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작은 불씨들이 저들끼리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이젠 수백 년도 넘게 지난 일이지. "
검은 마법사는 사라졌고, 별도 훔치지 못했지만 괜찮아. 네가 있으니까. 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팬텀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담담하게 고백하는 팬텀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입을 벙긋거리다 이내 다물었다. 수백 년을 같은 길을 걸었다. 길고 긴 시간의 늪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얕은 바람에 의해 부드러운 머리칼이 살랑였다. 내 어깨 위에 기댄 머리에 가볍게 마주 기댔다. 팬텀이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었다.
사막의 밤에서의 장점이라면 서로를 온전히 의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이 유일할 것이다. 가방에서 접이식 천막을 꺼냈다. 에반이 자신이 메이플 월드 전역을 돌며 수련하던 시절 썼던 것이라며 준 것이었다. 짙은 자주색 천막을 바닥에 내려놓고 한 발로 중심을 지탱한 뒤 뼈대를 잡아 양옆으로 늘리자 한 손에 잡히던 직사각형의 형태가 커다란 삼각형의 천막으로 변했다. 생각보다 줍네. 크다고는 하지만 성인 2명이 붙어 자야 간신히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이리 와. 먼저 누운 팬텀이 내 쪽을 향해 팔을 벌렸다. 담요를 걷고는 옆으로 눕자 팔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렇게 자는 거 오랜만이네.”
예전엔 이렇게 자주 잤었는데. 항상 자리가 좁아서 가위바위보로 잠자리를 정했었는데. 누가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항상 둘이 한 조였잖아. 서로 닿기 싫어서 투닥대면 여왕님이 듀얼보우건을 치켜들곤 했었는데. 과거의 일이 생각난 게 즐거운지 팬텀이 키들댔다. 사실 그때 티는 안 냈지만 좋았어. 찡그린 얼굴이 귀여웠거든.
뭐야. 그런 얼굴로 보지마. 나 변태 아니라고. 사실 처음 만나기 전 너에 대한 인상은 나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부딪히더라. 성격이 너무 상극이라 그런가. 뭐, 결국 이렇게 됐지만. 둔한 샌님의 삽질 기간이 길었던 게 좀 흠이었지만 내 넓은 아량이 샌님을 받아들였지.
까분다. 울컥한 내가 으르렁거리자 팬텀이 능글거렸다. 좋으면서 튕기기는. 몸을 얽은 팔을 떼어내곤 몸을 반대로 돌렸다. 이런 놈이랑 무슨 말을 하겠다고. 눈꺼풀을 억지로 가두자 뒤에 팬텀이 찰싹 붙어왔다.
“삐졌어?”
“삐지긴 무슨.”
역시 삐졌구나. 귀엽고 속 좁은 샌님. 녀석의 깐족거림이 화를 부추겼다. 옆눈으로 흘기자 팬텀이 목 안쪽으로 웃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장난이야. 장난. 기분 나빴어? 샌님이랑 있으면 진지한 얘기밖에 안 하게 되니까 분위기 좀 띄워보려고 장난 좀 친 거야. 장난이라고 하면 다냐. 음, 다긴 한데 우리 샌님한테는 아니지. 기분 나빠? 우리 샌님 기분을 어떻게 풀어줘야 할까.
아, 봉인 전 얘기했으니까 첫인상 얘기해줄게. 안 궁금한데. 에이, 솔직히 듣고 싶잖아. 조금은 솔직해져도 돼.
궁금하지? 옆에서 왱알대는 게 귀찮아 손을 대충 내저었다. 마음대로 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팬텀이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사실 프리드 녀석이 네 얘길 자주 했었어. 영입하고 싶어서 공을 많이 들였는데 네 생각이 너무 완고해 보여서 절대 안 넘어갈 것 같았대. 고집 세고 융통성 없는 네 성격을 간파한 거지. 그래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너한테 연락이 와서 기뻤다고 하더군.”
빛을 다루는 마법사라던데 메이플 월드 전역을 누비던 내게도 생소한 힘이었어. 마법에 대해 자세히 알진 못하지만, 저 녀석이 인정할 정도면 대단한 녀석이겠구나 싶었지. 그렇게 프리드가 동료들을 소개해주기로 한 날 약속장소에 도착했는데 웬걸, 웬 샌님 같은 녀석이 한 명 앉아있는 거야.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때 네가 프리드가 입이 닳도록 말한 ‘루미너스’일 거라는 생각을 못 했어. 검은 마법사에게 대항하기 위한 중요 말로 쓰기에는 네가 너무 어려 보였거든.
프리드가 소개할 때 알았지. 네가 루미너스라는 걸.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얼굴이 앳돼 보였어. 무뚝뚝한 목소리로 내게 자기소개를 하는 걸 보고 많은 생각이 들더라. 너와 마주친 순간, 직감이 경고했어. 넌 이 자와 맞지 않아.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다른 나머지 결국 같은 길을 걸을 거라고. 거부감이라면 거부감이었고 껄끄러움이라면 껄끄러움이었어. 넌 늘 복잡해 보였고 그 작은 머리통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였으니까. 난 복수에 신경이 잔뜩 곤두세워진 상태였고 그래서 더 거슬린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속까지 곪아 썩어버린 나와 달리 모든 걸 잃고도 담담하게 구는 너를 이해할 수 없었거든.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고 어깨 위에 얼굴을 묻었다. 입이 막힌 탓에 소리가 웅얼거렸지만 내게는 또렷하게 들렸다.
애초에 우정이니 동료애니 그런 걸 바라고 들어간 것도 아니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근데 계속 네가 걸리는 거야. 다른 거에 눈 돌릴 새가 없는데 네가 계속 생각나고 샌님이라면 어떨까, 샌님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같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어. 눈을 뜨고 다시 감을 때까지 네 생각이 났고 내 일상에서 널 빼놓을 수 없을 지경이 됐지. 감정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소중한 것을 잃는 건 한 번으로 충분했으니까. 다시 이 일이 반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었어. 이미 무너져 폐허가 된 마음에 누군가를 들여놓는 것 자체가 힘들더라. 그래서 묻어두려고 했어. 잊을 수 있다고. 이 또한 지나갈 거라고 속으로 되뇌이면서 말이야.
근데 아니었어. 내가 날 너무 과대평가했지. 네가 매일 꿈에 나왔어. 꿈속에서 네가 나를 향해 웃는 날은 종일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고 인상을 찌푸리고 혐오스럽다는 듯이 보는 날이면 비가 오는 것처럼 기분이 좋지 않았어. 늘 보고 싶었고 닿고 싶었어. 가끔 열리는 회의에 네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게 좋아서 매번 참석했어. 뚱한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었고, 어쩌다 눈이 마주칠 때면 입 맞추고 싶었어. 안 그런 척 날 걱정해주는 게 좋아서 유치하게 일부러 한량처럼 굴기도 했어. 잊으려고 했는데, 널 잊기에는 네가 너무 사랑스럽더라.
넌 어땠어? 날 처음 봤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어? 하나부터 열까지 나에 대해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말해줘. 나처럼 너도 내가 처음부터 사랑스럽다고 느꼈는지 궁금해. 말해줘, 응? 루미너스.
어린아이처럼 품을 파고 들으며 어리광부리는 모습에 밀어내려고 했지만, 몸을 감싼 팔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여간. 몸을 돌린 후 팔을 벌려 등을 마주 감싸 안자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 처음이라... 수백 년이 지났지만, 팬텀을 만났던 날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했다.
“네가 프리드를 찾아갔던 날, 난 늘 그렇듯 연구를 하고 있었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던 때라 평소 같았으면 피곤함을 느낄 법한데 이상하게 그 날따라 컨디션이 좋았어.”
몇 날 며칠을 풀지 못했던 술식들이 풀리고 운이 좋다면 아침이 오기 전까지 완성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러던 찰나에 프리드가 들어왔다. 그 유명한 괴도 팬텀이 찾아와 합류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쳤다는 소식이었어.
오로라가 다른 차원에 있었기 때문에 너에 대해 자세한 건 몰랐지만 네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 검은 마법사를 제지하는 데에 좋은 패가 될 거라고 프리드는 말했고 나는 그를 신뢰했기 때문에 수긍했다. 그렇게 만난 너는 어딘가 지쳐 보였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말을 프리드에게서 들었지만, 그보다는 좀 더 악에 받친 것처럼 보였지. 넌 정말 이상했어. 나와는 너무 달랐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겹쳐 보이기도 했다. 표출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 아픔은 같았으니까.
그래서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네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넌 늘 위태로워 보였고 누군가 잡아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어. 복수,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듯이 늘 무모하게 행동했으니까. 같은 생각을 하는 주제에 나는 우습게도 이 감정을 동정이라고 정의내리고는 네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네가 고백했던 날, 나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어. 너를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우리는 선과 선 끝에 있는 사람이며, 다가가려 해도 절대 좁혀질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내 거절에 상처받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네 얼굴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아, 사랑이구나. 여태 내가 했던 행동들은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단순한 위선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는 순수한 욕망에서 행해왔던 것들이었구나.
어린아이를 재우듯 등을 천천히 토닥이자 가슴에 얼굴을 묻어왔다.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에 늘 자신감과 여유로 가득 차 보이던 어깨가 오늘따라 좁아 보였다. 완벽히 아문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것을 비관하던 예전과는 달리 앞으로 나아갈 의지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구원자였으니 앞으로도 같이 나아가면 되는 거다. 그때와 달리 이젠 혼자가 아니니까. 팬텀. 잠들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다 잠이 오지 않는 눈을 덮었다. 사막에서의 첫 번째 밤이 지나갔다.
차가운 물을 얼굴에 문대자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져온 물로 가볍게 씻은 뒤 아침을 준비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끼니는 마른 육포와 빵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흰 빵을 반으로 갈라 나눠 먹은 뒤 떠날 채비를 했다. 지도상으로라면 북서쪽으로 2시간 정도 걷다 보면 오아시스가 나온다고 적혀있었다. 그곳에서 물을 가져오고 주변에 상인들이 있다면 먹을 것을 사면 될 터였다. 아리안트를 떠나기 전 음식을 넉넉하게 가져오긴 했지만 변수투성이인 여행이다 보니 더 준비해서 나쁜 것은 없었다. 천막을 정리하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팬텀이 내미는 손을 깍지를 잡아 꼈다. 험난한 여행이 될 터였다.
“이상하다.”
왜 이러지. 출발한 지 한 시간쯤 됐을까, 한 방향으로 고정되어있던 바늘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평소 같았으면 텔레포트나 마법 지도로 해결했을 터였지만 서로에게 집중하자는 뜻으로 마법 아이템은 가져오지 않기로 했다. 팬텀이 가져가 고쳐봐도 나침반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를 어쩌지. 조금이라도 방향이 틀어지면 오아시스에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열을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가. 그렇다기엔 아쿠아리움에 갔을 때도 멀쩡했는데. 고장 난 나침반을 두고 앞으로의 대책을 생각하는 내게 팬텀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익숙한 회색 두루마기에 주문 술식이 적혀있는 문서. 마을 귀환 주문서였다.
“너...”
“우선 쭉 가자.”
처음 출발할 때 나침반이 가리키던 방향이 여기였으니까 중간에 방향이 틀어지지 않는 이상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반 정도 왔으니 1시간만 더 걸어보자. 만약에 오아시스가 보이지 않는다면 귀환서를 쓰자.
팬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선 가보고 없으면 귀환서를 쓰자고?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걸 이를 악물었다. 나보고는 가져오지 말라면서 너는 왜. 수십 개의 말들이 엉망진창으로 섞여 꼬여 들어갔다. 입을 열어 말을 하려 해도 목이 메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꼬이려는 혀를 억지로 바로 한 채 입을 벌렸다.
“팬텀.”
“...”
“이걸 왜 가져온 거야.”
이거 1인용이잖아. 써도 한사람밖에 못가잖아. 내 반박에 팬텀이 시선을 피했다. 이걸 대체 왜 준비한 거야. 팬텀의 성격상 예상치 못한 일을 대비해 주문서를 가져온 건 이상하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이었다면 분명히 밝힌 장이 아니라 두 장을 가져왔을 것이다. 눈가가 시큰해지고 감정이 북받쳤다. 그의 끝을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위태롭게 쌓여있던 모래성이 무너졌다.
“여행이 끝나면 얌전히 치료받기로 약속했잖아.”
“샌님, 진정해봐.”
“진정?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넌 이 상황에서 냉정할 수 있나 보지?”
“루미너스.”
“그렇게 부르지 마.”
“...”
너 여기오면서 이상해졌어. 네가 네 입으로 아이템 가져오지 말라며. 근데 저걸 왜 가져와? 두 장도 아니고. 한 장밖에 안 가져왔잖아. 억눌러왔던 감정이 터지자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었다. 주문서를 땅에 내던졌다.
“안 써. 죽어도 같이 죽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시체도 못 찾게 사막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군. 내 빈정거림에 팬텀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리가 지금 소꿉장난하는 것처럼 보여?”
“누가 모른다고 했나? 난 혼자 갈 생각 없어.”
팬텀이 뭐라고 하든 난 내 뜻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최악까지 생각했던 여행이었다. 수백 년 전 시간의 신전에서 내던졌던 목숨을 이제 와서 버린다 한들 미련은 없었다. 내 굳은 뜻을 알았는지 팬텀이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넘겼다. 마른 뺨이 오늘따라 핼쑥해 보였다.
“억지 부리지 마 샌님. 이건 목숨이 달린 일이야.”
“넌 지금 내가 떼쓰는 거로 보이나? 이곳이 죽음의 땅이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그러니까 더더욱 가지 않겠다는 거다. 내가 가면 넌 어쩌려는 거지? 그 잡초 같은 생명력으로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한번 터진 감정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차분하고 침착한 성미도 팬텀 앞에서라면 무용지물이 되곤 했다. 무언가 말하려는 팬텀을 보지도 않은 채 앞장서 걷자 한숨을 쉬며 뒤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내 이름을 부르는 팬텀을 모르는 척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침반이 가리켰던 방향대로 30분쯤 걷자 오아시스가 나타났고 우리는 부족한 물과 식료품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냉랭해진 분위기는 쉽게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하고, 잠자리를 준비하던 순간마저 불씨가 공기 중에 마찰하는 소리 외에는 침묵으로 가득했다. 좁은 텐트 안에서 간격을 두려 애쓰며 몸을 반대로 돌아누웠다. 밖에서 타오르는 모닥불에 의해 그림자가 생겨났다. 벌써 사막에서의 이틀째 밤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나흘하고도 하루를 더 간다면 마가티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고용인들은 마가티아에 미리 도착해 크리스탈 가든을 정박해 놓는다고 했었다. 애초에 마가티아에 도착하면 다 나을 때까지 얌전히 치료받는다는 조건으로 여행을 허락한 것이었다. 모두가 말리는 여행을 허락해준 이는 다름 아닌 알프레드 집사였다. 가끔 기분 전환 겸 나가는 것도 건강에 좋습니다. 연륜의 날카로움은 때때로 빛을 발한다. 나이로 따지자면 팬텀과 루미너스 쪽이 훨씬 많지만, 경험에 의한 관록은 알프레드 쪽이 훨씬 깊고 견고했다. 알프레드 집사의 눈에도 보일 거다. 팬텀의 생명력이 조금씩 꺼져가고 있다는 걸. 그렇기 때문에 허락한 것이겠지. 팬텀이 순순히 말을 들을 위인이 아니기도 하고.
각오를 하지 않고 온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은 너무나 암담했다. 애써 외면해왔던 것을 직면하니 숨이 막혔다. 주변 사람들을 수없이 잃어봤건만 팬텀이 죽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졌다. 사람이 죽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건만 잃고 싶지 않았다. 늘 흘러가듯 살던 내게 처음으로 욕심이 생겼다. 세상 모든 것을 줘도 잃고 싶지 않은 사람. 내게 사랑을 가르쳐준 사람. 나의 구원자. 나의 까마귀, 팬텀. 운명에 대항할 수 있다면 대항하고 싶었다. 다시 빛나지 못해도 좋았다. 태양이 있을지언정 별과 함께 하는 건 달이니까. 이미 달의 빛을 받아버린 별은 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뻑뻑한 눈에 물이 고였다. 팬텀이 깰까 참으려 눈을 부릅떴다. 뺨에 축축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입이 벌어지려는 걸 기침을 하는 척 몸을 뒤척였다. 뜨끈한 숨을 불규칙적으로 내뱉었다. 어떻게든 잠들려고 애쓰는데 등에 온기가 닿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쓸데없이 예민한 놈.
“미안해.”
“...”
내가 잘못했으니까 울지마. 말에 무슨 힘이라도 담긴 건지 문장이 끝나자마자 그간 참아왔던 눈물샘이 터졌다.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걸 팬텀은 별다른 말 없이 그저 나를 꼭 안아주었다. 죽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에게 가도 좋으니 그저 살아만 있어 달라고.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건 팬텀인 걸 알면서 어리광부리고 싶었다. 눈물은 얼굴이 흠뻑 젖을 때쯤 되어서야 멈췄다. 몸을 제 쪽으로 돌리려는 걸 엉망이 된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팬텀의 손이 턱을 들어 올리려 하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얼굴 보여줘.”
“싫어.”
잔뜩 운 탓에 목소리가 우스꽝스럽게 갈라졌다. 억지로 가둬놨던 마음들이 폭포수처럼 밀려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말았다. 이 상태에서 얼굴을 마주한다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릴 것 같았다. 더 이상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놀림받을까봐 시선을 피한다고 생각했는지 팬텀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달래왔다.
“안 놀릴 테니까 얼굴 보여줘.”
“...싫어.”
너한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목 끝까지 나오려는 말을 삼키고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팬텀의 손에 의해 억지로 얼굴이 들렸다. 붉게 충혈된 눈과 보랏빛 눈이 마주쳤다.
“왜 이렇게 울었어. 예쁜 얼굴 망가지게.”
“...”
“봐줄 거라고는 얼굴밖에 없는데 팅팅 부을 정도로 울면 어떡해.”
장난스러운 말투와는 달리 눈가를 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쵹. 정수리를 기점으로 온 얼굴에 입맞춤이 쏟아 내렸다. 이마. 눈가. 코. 볼. 턱. 그리고 입술. 입을 벌리자 혀가 부드럽게 입안을 침범했다. 얇은 점막을 쓸어내리며 애무하는 혀에 황급히 목을 끌어안아 매달렸다. 로브 안으로 들어와 맨살을 쓰다듬는 감촉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팬텀의 슈트 단추를 푸르려고 했으나 손이 미끄러져 헛손질을 했다. 다시 한번 손을 뻗자 이번에는 팬텀이 손을 들어 깍지를 꼈다. 길고 긴 키스 끝에 입술을 떼자 투명한 액체가 늘어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팬텀이 말했다.
“여기선 안돼.”
왜. 너도 흥분했잖아. 좁은 공간 탓에 붙어있을 수밖에 없어서 맞닿은 하체에 그의 흥분이 여실히 느껴졌다. 여기서 하면 다쳐. 마가티아 가면 놔달라고 해도 안 놔줄 테니까 그때 가서 하자. 평소였으면 따랐을 팬텀의 설득에도 수긍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받고 싶었다. 다리를 들어 뭉근하게 사타구니를 자극해도 팬텀의 태도는 견고했다. 빨리 자자. 밤이 늦었어. 나를 제 품에 안고는 어제 내가 그랬던 것처럼 등을 토닥였다.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눈꺼풀을 세게 감았다. 찡그린 미간을 손으로 펴는 팬텀의 손이 느껴졌다.
결국 그 날밤은 제대로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짧은 시간 동안 얕은 잠을 잔 탓에 피곤이 몸을 내리눌렀다. 좁은 공간에서 잔 탓에 온몸이 뻐근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는 물가에 앉아 세수했다. 어제 상인들에게서 먹을 것을 구매한 탓에 오늘은 넉넉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양의 젖으로 만든 버터를 바른 빵에 돼지고기를 말린 얇은 햄을 끼워 넣었다. 빵을 잘라 내밀자 어제의 거절이 미안했는지 팬텀이 굿모닝 키스를 해왔다. 나는 대답 대신 물을 내밀었다. 새벽에 오아시스에서 길어온 물이었다.
나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비가 올 때가 됐는데. 니할 사막의 날씨는 심한 변덕을 자랑한다. 화창하다가도 비가 오기도 하고 비가 오다가도 화창해지기도 한다. 운이 나쁘면 때때로 우박이 쏟아지기도 한다. 여태까지는 운 좋게 날씨가 나쁘지 않았지만 언제 바뀔지는 모르는 일이다. 날씨는 다행히도 첫날과 두 번째 날처럼 매우 화창했다. 소녀에게 받은 옥빛 돌을 움켜잡았다. 돌을 잡은 채 태양을 보고 소원을 빌면 아리안트의 신인 태양신이 소원을 들어준다지. 평소라면 근거 없는 낭설이라며 지나쳤겠지만, 오늘만은 믿고 싶었다. 사막을 걷는 내내 비가 오지 않고, 무사할 수 있길. 그리고... 팬텀의 생명이 다하질 않길. 내가 눈을 감고 기도하고 있을 때 팬텀은 천막을 정리했다. 정리된 천막과 물을 챙겼다. 짐은 긴 여정에 비해 간소했다.
땅을 향해 내리쬐는 빛은 늘 뜨거웠지만, 오늘은 그 세기를 더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땀 한 방울이 턱선에 맺혔다 흘러내렸다. 걸음을 멈추자 이런 내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지 팬텀이 나를 불렀다.
“샌님?”
“....잠깐, 잠깐 쉬었다 가자.”
고작 더위 따위에 지다니. 수련을 게을리했다고 나약해진 건가. 이를 악물고 참아보려고 했지만, 현기증 때문에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시야가 반 바퀴 뒤집혔다가 제 자리로 돌아왔다. 괜찮아? 급하게 천막을 펴고 안에 들어가 앉았다. 습기가 없는 탓에 그늘에 앉자 서늘함이 몸을 스쳤다. 뚜껑을 열어 물을 들이켜자 미지근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넘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빙글빙글 도는 머리를 진정시켜보려 다리를 모으고 그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누군가가 귓가에 큰 소음을 낸 것처럼 귀가 먹먹하고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일사병인가. 하긴 평소엔 햇빛은 보지도 않고 살다가 요 며칠 몇 개월 맞을 햇빛을 한 번에 맞았으니 이상 증상이 일어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샌님, 괜찮아?"
"괘, 괜찮…. 우욱,"
장기가 꼬인 것처럼 속이 뒤틀렸다. 땀으로 젖은 몸이 메스꺼움에 헛구역질했다. 젠장. 이러면 안 되는데. 팬텀도 성치 않은 마당에 내가 이러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너무나도 적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열이 오르는지 달뜬 숨이 터져 나왔다.
"안 되겠다. 오늘은 여기서 쉬자."
"난 괜찮아. 계속 가야..."
"그 상태로 움직이는 건 무리야. 더 악화하기 전에 쉬어야 해."
이거라도 마셔. 팬텀이 내민 건 해열제였다. 혹시 몰라 가져온 비상약인 것 같았다. 뚜껑을 열자 말린 티트리꽃의 향이 느껴졌다. 마법 해열제인 듯싶었다. 약을 먹고 드러눕자 바로 약효가 도는지 머리를 괴롭히던 두통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골골대는 이마에 손을 덮어 체온을 확인하던 팬텀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역시 안 되겠다.”
“뭐가.”
“결혼하자.”
“결...뭐?”
멍한 머리에 부여잡고 있던 정신이 확 들었다. 역시 샌님은 너무 샌님이야. 혼자 두면 분명 바보같이 끙끙거리다가 앓아누울걸. 거기에는 샌님도 동의하지? 이 괴도 팬텀이 결혼해준다는데 감사하게 여기라고. 장난기가 가득 담긴 말들은 들리지 않았다. 내게 들리는 건 ‘결혼’이라는 단어 하나였다. 결혼하자고? 누가? 나랑 팬텀이? 잔뜩 굳어버린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팬텀은 부끄럽다는 듯이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놀라 몸을 일으킨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까는 장난이었고.”
“...”
“제대로 할게.”
사실 사막도 이러려고 온 거야. 바지 주머니에서 반지함을 꺼냈다. 검은색 반지함을 여니 붉은색 벨벳 홈에 커더란 보석이 박힌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랑 결혼해줘.”
“...”
“잘할게. 말도 잘 듣고 속도 안 썩일게.”
장난도 치지 말라고 하면... 안 치긴 힘들겠지만 노력해볼게. 긴장되는지 답지 않게 뒷말을 붙이는 팬텀을 멍하니 보다가 반지함을 받아들였다. 중앙에 박혀있는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제외하고는 깔끔한 밴드의 디자인이 제 취향을 고려한 것인 듯했다.
“마음에 들어?”
고개를 끄덕이자 팬텀이 반지함에서 반지를 빼냈다. 끼워줄게. 굳은살투성이인 왼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약지에 꼈다. 눈대중으로 파악한 건지 자로 잰 것처럼 크기가 딱 맞았다. 거친 손에 투명한 빛의 보석이 반짝였다.
“잘 어울린다.”
“...”
“승낙해줘서 고마워.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혹시 꿈이 아닐까. 눈만 뜨면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꿈. 나는 아직도 악몽을 꾸곤 했다. 눈을 뜨고 일어나면 옆에 있던 팬텀이 사라져 온전히 혼자가 되어버리는 지옥 같은 악몽. 그럴 때마다 나는 스며드는 한기에 몸을 떨며 울부짖고는 했다. 거짓말. 대답은 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얼굴에 조용히 눈을 감을 뿐이었다.
조촐한 결혼식에 하객은 없었다. 결혼식의 구성원 또한 나와 팬텀이 전부였다. 주변에 굴러다니던 시든 나뭇잎들을 모아 부케를 만들었다. 사방이 끝없는 모래벌판뿐인데도 내게는 그 어떤 호텔보다 화려한 버진로드처럼 느껴졌다. 저만치 팬텀이 옷매무새를 다듬는 것이 보였다. 천천히 팬텀을 향해 걸음을 향해 옮겼다. 면사포 대신 쓴 갈색 망토가 시야에 언뜻 보였다 사라졌다. 몇 걸음만 내디디면 그의 옆인데 걸음마다의 속도가 매우 느리게 느껴졌다.
드디어 그의 옆에 섰다. 몸을 돌려 팬텀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팬텀이 천천히 혼인 서약을 읊기 시작했다.
“신랑 팬텀은 신부 루미너스를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팬텀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신부 루미너스는 신랑 팬텀을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이로써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바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맹세의 키스를 해주세요.”
팬텀이 얼굴을 잡아 고개를 틀어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담백한 키스는 오랜만이었다. 다가올 미래가 얼마나 나를 고통스럽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행복을 즐기기로 했다. 팬텀이 아픈 이후로는 늘 뒤편에 불안감이 존재했는데 온전한 기쁨은 오랜만이었다. 사랑해. 팬텀의 고백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아쉽다. 여기가 사막만 아니었어도.”
마가티아에 도착하면 방부터 잡을 거야. 해열제를 복용한 탓인지 열은 금세 내려갔다. 팬텀의 품 안에 안겨 그의 심장 박동에 귀를 기울였다. 쿵 쿵쿵. 일정한 박자로 뛰는 맥박에 마음이 편해졌다. 위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드니 사랑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는 팬텀과 눈이 마주쳤다.
“아주 예뻐 죽겠어.”
이마 위로 말캉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그의 키스를 받다가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다. 얼굴을 쓰다듬는 손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치료가 끝나면 엘나스에서 살자.”
“...”
“아무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는 곳으로 가서 아이도 낳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서로 함께하고 의지하면서... 그렇게 살자.”
샌님 눈 좋아하잖아. 내가 지나가듯이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구나. 때때로 팬텀은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추위도 잘 타면서. 볼멘소리로 중얼거리자 팬텀이 웃었다. 바보 샌님. 그런 건 사랑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어. 다시 한번 다가오는 입술에 입을 내밀었다. 팬텀과 처음 키스했을 때처럼 심장이 떨렸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몸을 감싸오는 온기에 기대 천천히 잠의 수마에 빠져들었다. 세 번째 밤이 지나갔다.
상쾌한 아침이었다. 늘 몸이 배겨 깼던 전날 아침들과는 다르게 불편하지도, 뻑적지근하지도 않았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는 팬텀을 깨웠다. 물로 몸을 씻고 아침 먹을 채비를 했다. 오늘 메뉴는 샌드위치였다. 호밀빵에 양상추와 토마토, 소고기 햄을 올렸다. 다른 음식이 먹고 싶다는 팬텀의 불평은 마가티아에 도착하면 맛있는 음식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한 뒤에야 막을 내렸다. 서둘러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어제 가지 못한 거리를 가야 하기 때문에 갈 길이 멀었다.
팬텀. 출발하자. 가방을 어깨에 맨 뒤 팬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평소 같으면 늘 그랬듯 앞장섰을 터인데 오늘따라 움직임이 느렸다. 팬텀? 어, 응·가가. 짐을 덜 챙겼는지 뒤따라오는 발걸음이 부산해 보였다.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아, 당연하지. 멀쩡해.”
샌님 정도는 한 손으로 들어 올릴 수 있다고. 허세는. 아프면 말해, 참지 말고. 알았어. 1시간쯤 더 걸었을까. 비슷한 속도를 유지하던 팬텀의 걸음이 다시 느려지기 시작했다. 팬텀? 뒤를 돌자 팬텀이 주저앉은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팬텀!!!”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면 잠깐 쉬면 나아.”
괜찮긴 무슨. 사막을 건너기 전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은 누가 봐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다급히 가방에서 약을 꺼내 내밀었다. 약을 건네받는 손이 떨렸다. 결국 약을 반쯤 쏟은 팬텀이 가슴을 움켜잡았다.
“아, 젠장...오면서 좀 나아졌, 다 싶었는데 오늘은 조금, 아프네.”
잠깐만. 우선 눕혀야겠다 싶어 가방에서 천막을 꺼내려는 걸 팬텀이 막았다. 아니, 그거 말고.
“안아줘.”
반쯤 쓰러져있는 팬텀을 무릎을 꿇고 껴안았다. 귓가에 거친 숨이 닿았다. 꿈처럼 당장이라도 팬텀이 가루가 되어 사라질 것 같았다.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멈출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마지막일까.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는데. 혹시 내가 이 무모한 여행을 수락하는 바람에 팬텀의 수명이 줄어든 게 아닐까.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팬텀. 내 떨리는 목소리를 들었는지 팬텀이 웃었다.
“미안해.”
“...”
“널 괴롭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사실, 알고 있었어. 마가티아에 도착하지 못할 거라는 거. 난, 하아. 감이 좋잖아. 그래서, 알고 있었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다른 것보다 샌님이 먼저 생각났어. 우리 샌님, 나 없으면 어떻게 살지. 안 그렇게 생겨서, 정이 많은 사람인데. 내가 없다고 슬퍼하면 어쩌지. 가뜩이나 상처가 많은데, 너무 큰 상처를 줄까 봐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죽을까 생각도 했었어.
괴도의 결말치고는 나름 나쁘지 않잖아? 팬텀의 숨이 더욱더 거칠어졌다. 마을 귀환 주문서를 찢으려는 걸 팬텀이 말렸다. 이미 늦었어.
그런데 내가 안되,겠는 거야. 내가 아플 때마다 고통스러워하는 널 보는 게 괴로운데 네가 없다고 생각하니 숨을 쉴 수가 없었어. 그래서, 오고 싶었어. 사막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널 담고 싶어서.
우리 결혼 한 거 알지? 나 죽었다고, 다른 놈한테 가면 안 돼. 하늘에서, 지켜볼 거야. 맞닿은 가슴에서 심장 박동이 점점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울지마. 가슴이 찢기는 고통이 너무나 커 눈물로 시야가 엉망인 것도 몰랐다. 윽. 팬텀의 몸이 잠시 경직됐다가 등을 둥그렇게 굽혔다.
“사랑한다고 말해줘.”
“사랑해.”
“나도 사랑해.”
“사랑해.”
“...”
“사랑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눈물들이 팬텀의 어깨 가를 적셨다. 죽지 마. 점차 체온을 잃어가는 몸뚱이를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엘나스에 가서 살자며.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에 숨어 서로 의지하며 살자는 꿈은 어떻게 된 거야. 바람이 불었다. 축 늘어진 몸을 모래바람이 가져갈 것 같아 있는 힘을 다해 껴안았다. 이제 모든 걸 혼자 해야겠지.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혼자 몸을 씻고, 홀로 쓰기엔 큰 침대에 누워 잠자리에 들겠지. 널 보내고 시간이 지나면 슬프고 고통스러운 감정도 애써 추스른 척 숨기며 살아가야겠지. 멈춰버린 네 시간과는 달리 내 시간은 계속 흘러가니까. 하지만 집에 도착하면 난 네 몫의 수프를 끓이고 네가 좋아하는 향의 바디워시를 사겠지. 칫솔은 항상 두 개를 꺼내놓을 거고 네가 좋아하는 장미꽃을 화병에 담아놓을 거야. 이젠 좀 잊으라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도 남은 생을 너를 그리워하며 혹시라도 네가 올까 봐 설원 저 끝 창밖을 바라보며 살겠지.
사랑했어, 팬텀. 이젠 그곳에서 고통따윈 잊고 푹 쉬어. 이미 그곳에서 널 사랑하는 사람들의 환대를 받고 있을 거라 믿고 있어. 내가 따라갈 때까지 평안하길. 안녕, 내 사랑.
몸 곳곳을 스며드는 찬바람에 외투를 바로 했다. 엘나스에 산지 하루 이틀도 아니건만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오랜만에 장이 서는 날이었다. 아무래도 엘나스의 기후 특성상 식자재를 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엘나스에서는 주기적으로 장이 섰는데 주로 메이플 월드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부터 시작해서 온갖 희귀한 식자재들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규모를 자랑했다. 간만에 사 온 신선한 재료들에 기분이 좋아졌다. 나 왔어. 산 귀퉁이에 자리한 탓인지 절벽 끝과 끝 사이에 윙윙 거리는 큰 소음이 일었다. 나무로 지어진 집이 추위 때문인지 텅 비어있는 것처럼 쓸쓸하게 느껴졌다. 종이봉투를 식탁 위에 올려두고 서둘러 벽난로를 땠다. 조금씩 스며드는 온기에 외투를 벗고 사 온 물건들을 정리했다. 흰 빵이랑 소금, 버터, 양상추, 토마토, 햄도 있고, 그리고...
오늘 사 온 것들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물품이었다. 사 온 것들을 냉장고에 넣어 닫은 뒤 방으로 향했다. 방에는 마찬가지로 나무 책상과 의자와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는 책장, 그리고 혼자 쓰기엔 꽤 넓은 침대가 놓여있었다. 포장에 싸여있는 붉은 장미를 조심스럽게 빼내자 가시 없이 매끈한 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책상 위에 비어있는 기다란 화병 안으로 밀어 넣자 부드럽게 밀려 들어갔다. 장미는 붉고 탐스러웠으며 생기가 가득했다. 나는 오늘 산 장미 탓에 한쪽으로 몰린 시든 장미를 그대로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