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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생

w. 다뉴엘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것을

 

 

그 녀석을 위해 존재하는 문장이라 생각했다. 세상의 온갖 화려한 것을 끌어 모아놓고 그 위에 격 없이 걸터앉더라도 그 녀석은 빛나겠지. 한없이 자연스럽고 오만하겠지. 마치 그 곳이 자신의 자리인양. 그래서였을까, 네가 나와 같은 교복을 입고 교실 앞에 서있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너는 나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기에.

 

 

 

***

 

 

 

 

-무더운 어느 여름날이었다.

 

 

"자자, 조용히 좀 해라. 오늘 우리 반에 전학생이 왔다."

"쌤, 전학생 이뻐요?"

"잘생겼어요?"

"조용, 조용!"

 

 

출석부로 교탁을 쾅쾅 두들겨대며 반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는 선생님의 고함소리에 루미너스는 문제집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톡. 그 잠깐 사이에 힘이 들어갔는지 샤프심이 부러져 수학 공식을 유려히 적어 내려가던 흰 노트 위로 어긋난 점이 찍혔다. 전학생이라. 한동안 또 시끄럽겠군. 어차피 누가 오든 말든 그건 루미너스의 신경 밖이었다. 물론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온다면야 어려운 문제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나눠볼 수도 있겠다만 루미너스는 본인도 잘 알고 있듯 사교성이 그리 썩 좋지 않았다. 그리고 본인도 이를 고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 전학생 잘생겼다, 이놈들아. 그러니 조용히 안 해?"

"와 대박. 야 들었어? 전학생이 잘생겼대!"

"전학생, 들어와라!"

 

 

닫혀있던 앞문이 드르륵 열리며 들어오는 남학생의 기다란 다리가 성큼 교실 바닥을 내딛었다. 딸깍, 딸깍. 부러진 샤프심을 후 불어버리곤 다시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샤프를 딸깍거리던 루미너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샤프심이 왜 안 나오지. 끼었나. 짙은 베이지 색의 바지에 흰 와이셔츠를 걸친 전학생이 교실 안으로 들어섰는지 반 아이들의 조잘댐이 사그라졌다. 딸깍딸깍딸깍. ...또 샤프를 분해해서 재조립해야하나. 딸,깍. 이젠 샤프 위의 버튼을 누를 때마다 뻑뻑함이 느껴지는 게 아무래도 샤프 안쪽에서 샤프심이 부러졌나보다. 샤프의 앞부분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분해하려던 루미너스는 교실 앞 쪽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미성에 고개를 들었다.

 

"안녕. 내 이름은 팬텀이고 오늘 전학 왔어."

 

 

그와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으나 그와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 같았다. 오전의 새하얀 햇살이 가득 차오른 교실 안에서도 유독 저 녀석이 서 있는 곳만 반짝이는 기분이었다. 샛노란 금발과 똑 닮은 금빛 속눈썹을 우아하게 늘어뜨리며 그 뒤로 비치는 선명한 자안은 루미너스가 보기에도 퍽이나 예뻐 보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잘 부탁해."

 

 

저와 그가 앞으로 친해질 일은 없으리라. 루미너스는 다시 고개를 숙여 이제 완전히 분해된 샤프를 내려다보았다. 샤프심이 나오는 구멍엔 완전히 부러져버린 샤프심이 새까맣게 끼어있었다.

 

마치 그의 이른 오판으로 인해 뒤틀린 그의 미래마냥.

 

 

 

***

 

 

 

첫 몇 주 동안은 예상했던 것처럼 반이 소란스러웠다.

 

하긴 키도 크고 얼굴도 잘난 남학생이 전학 왔다는데 녀석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려는 학생들이 없으리라 생각은 안했다. 다만 그 정도가 좀 지나쳤을 뿐. 쉬는 시간만 대면 무슨 팬 사인회를 하는 것 마냥 뒷문에 바글바글 모여들어 떠들어대는 여학생들 떼를 보고 있으면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하는 것 좋다. 그런데 적어도 하려면 남한테 피해는 주지 말아야할 것 아닌가. 루미너스는 한숨을 퍽 내쉬며 다시금 문제집에 고개를 떨구었다.

 

 

"하하,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어쩌긴 그래서 내가 그때 그 녀석한테 죽창을.."

"하하하!"

 

 

문제는 그 이후였다. 팬텀이라 했나. 아무튼 이름도 별 이상한 놈은 전학 온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친구들을 많이 만들다 못해 그룹까지 만들었다. 루미너스는 이를 굳이 알고 싶지 않았지만 제 뒷자리가 저 놈의 자리니 애석하게도 알 수밖에 없었다. 나날이 녀석의 친구 수는 늘어가더니 어느 순간부터 팬텀은 반에 암묵적으로 형성된 계급의 꼭대기에 서서 원래 왕좌 위에 앉아있던 녀석과 비등해졌다.

 

이 35명 남짓한 반에 피라미드가 형성돼있다는 것도 웃겼지만 루미너스는 그 속에서 자신이 벗어날 수 없다는 것에 환멸이 났다. 빨리 졸업을 하든 가 해야지. 같잖은 권력다툼에 끼어들 바에야 자신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게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 여긴 루미너스는 그저 성적에 집중했다. 철저한 방관자. 루미너스는 제 위치에 만족했다. 이대로 아무와도 엮이지 않은 채 조용히 졸업하고 싶었다. 그래, 정말이지 저런 흙탕물에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쟨 이름이 뭐야?"

"누구? 아아, 쟤? 루미너스인데 맨날 공부만 해. 좋은 대학 가려나보지."

"인생 재미없게 사는 놈이야, 진짜. 그냥 신경 끄는 게 나아. 전에 괜히 시비 걸었다가 잔소리가 쏟아지는데 나는 무슨 학주인줄."

"그래? 샌님이네."

 

 

키득거리며 웃는 녀석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따갑게 앉았다. 미끄러지듯 수식을 적어 내려가던 손이 멈칫했지만 루미너스는 아무것도 못들은 척 마저 문제를 풀었다. 어차피 그도 저 녀석에게 좋은 감정 따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반에 전학 온 이후로 소란이란 소란은 다 몰고 다니는 녀석. 그러면서 자신은 그 소란의 중심에서 빗겨나 늘 주변의 친구에게 뒤집어씌우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번드르르한 얼굴과 말솜씨로 선생님들을 속이며 제 옆의 친구를 팔아 능청스레 빠져나가는 꼴은 꼭 좀도둑 같았다. 아니, 좀도둑만도 못한 놈이지. 겉가죽이 아름다우면 무얼하나. 속이 글러먹은 것을. 루미너스는 냉소를 지으며 다 푼 문제집을 덮었다. 저와 다른 세계에 사는 놈과 말 섞은 일은 평생 없을 테니.

 

 

 

***

 

 

 

루미너스는 제 앞에 앉아 저를 빤히 쳐다보며 생글거리는 낯에 헛웃음을 흘렸다.

 

 

"안녕."

 

 

저런 놈이랑은 평생 말 섞을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우리 반 애들하곤 다 말을 텄는데 너완 아직 제대로 된 대화를 못해본 것 같아서."

"상관없어."

"난 상관있는데."

 

 

루미너스는 제 자리의 의자를 빼며 앉았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틈에 팬텀이 답지않게 루미너스 앞자리의 의자에 뒤돈 채 앉아 아예 턱까지 괴고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쓸데없이. 루미너스는 속으로 혀를 차며 샤프를 끼워 덮어두었던 문제집을 펼쳤다. 문제지의 흰 속살이 드러나자 빨간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풍경이 일순 스치듯 지나갔다. 팬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너 진짜 공부 잘하는구나? 그 문제집 어렵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

"내가 방해돼?"

"그래."

"근데 어떡하지. 난 샌님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마지막으로 풀었던 문제 그 다음으로 넘어가려던 루미너스는 저를 지칭하는 단어에 고개를 쳐들었다.

 

 

"난 좀도둑 같은 놈하곤 친해질 생각 없어."

"좀도둑? 그거 나야? 하하하!"

 

 

저를 비하하는 것이 분명한 별명임에도 녀석은 뭐가 재밌는지 그리 웃어댔다. 이상한 놈인 줄 알았더니 그냥 미친놈인가. 루미너스는 여상히 생각하며 문제를 읽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흰 종이와 검은 활자들이 인쇄된 단조로운 시야에 끝이 발갛게 물든 새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그의 시선을 끄려는 듯 톡톡 활자 위를 두들겼다. 하지만 루미너스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문제를 풀어나갔다. 둘 사이에 샤프심이 노트에 긁히며 나는 자그마한 소음과 두 사람 분의 옅은 숨소리가 섞이길 잠시, 팬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루미너스 정수리 위로 쏟아졌다.

 

 

"알았어. 방해 안 할게. 대신 친해지고 싶다 말한 건 진심이니까."

"......"

"난 갖고 싶은 건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거든."

 

 

오만한 말이 팬텀의 입 밖으로 나오고서야 숙여져 있던 루미너스의 고개가 들렸다. 마주친 두 쌍의 눈은 한 쪽은 부드러이 휘어져 있었지만 다른 쪽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팬텀은 우아하게 입 꼬리를 올린 채 루미너스의 손에 들린 샤프를 쏙 빼가더니 멋대로 루미너스의 문제집 한 귀퉁이에 제 전화번호를 휘갈기듯 남겼다.

 

 

"이거 내 전화번호니까 저장해두고."

"지워."

"내 번호 비싼 건데 샌님이니까 특별히 주는 거야."

 

 

알았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루미너스를 향해 숙이곤 그의 귓가에 대며 속삭인 팬텀이 자리를 떴다. ...쓸데없이. 루미너스는 팬텀이 멀어지는 걸 확인하자마자 필통에서 곧바로 지우개를 꺼내 팬텀이 남긴 낙서를 지워버렸다. 녀석이 사는 세상 따위, 알고 싶지도 않았다.

 

 

 

***

 

 

 

팬텀은 끈질겼다. 그것도 매우.

 

루미너스는 이번에도 책상 서랍에 놓인 작은 초콜릿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팬텀이 그에게 친해지겠다고 선포한 그 다음 날부터 매일 아침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루미너스의 책상 서랍 안엔 작은 초콜릿이니 사탕이니 하는 그런 간식들이 놓여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저런 작은 선물이 아니라 우유나 빵 같은 것도 있었지만 루미너스가 다른 반 친구에게 넘겨주는 걸 봤는지 그 이후로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사탕이나 초콜릿은 루미너스도 공부하던 중 부족한 열량을 채우기 위해 즐겨먹는 터라 이런 것까지 주변인들에게 뿌리기엔 아쉬워 챙겨뒀는데, 어느 순간부턴 가볍게 한 입에 먹기 좋은 것들이 그의 책상 서랍 한 켠을 가득 채웠다.

 

선물 공세를 받은 지 어느 덧 2주나 지났고 팬텀이 전학 온지도 어언 2달이 넘어 자리도 바꿨다. 이제 루미너스의 뒷자리에 앉았던 팬텀은 루미너스와 정 반대의 자리로, 그것도 대각선의 끝과 끝에 앉게 되었다. 교실 맨 왼쪽 앞자리엔 루미너스가 맨 오른쪽 뒷문 뒤엔 팬텀이 앉게 되어 둘은 멀찍이 떨어지게 되었다. 늘 시끄럽던 뒤통수가 이제 전보단 조용해져 루미너스는 이번 자리배치가 꽤나 맘에 들었다. 그러나 자리가 바뀌었다고 해서 팬텀의 선물공세가 끝난 건 아니었다. 이제 좀 더 과감해지기로 했는지 녀석은 단것들과 함께 쪽지도 넣어놓기 시작했다.

 

[오늘도 내 생각 하면서 화이팅!]

 

오늘도 역시나 쓸데없군. 루미너스는 손 안에 들린 쪽지를 와그작 구기며 바닥에 내던지곤 오늘치 사탕들과 초콜릿들을 한 손에 쓸어 담아 팬텀에게 향했다. 늘 그랬듯이 친구들 사이에서 시시덕거리며 웃고 있던 팬텀은 저를 향해 걸어오는 루미너스를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댔다.

 

 

"샌님!"

 

 

루미너스가 다가오자 길을 터주는 반 친구들 사이로 무표정한 낯인 채 걸어 들어온 루미너스는 팬텀의 책상 위로 오늘치 사탕과 초콜릿들을 와르르 쏟아내었다. 단단한 설탕조각들이 나무 책상 위로 쏟아지며 부딪치자 날카로운 소음들이 둘 사이의 적막을 산산이 깨부쉈다. 팬텀은 흔들어대던 손을 내리며 눈을 가늘게 좁히곤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일 있어? 오늘은 내 선물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나?"

"뭘 원하는 거지?"

"말했잖아. 난 그저 샌님과 친해지고 싶다고."

"난 싫다고 했을 텐데."

"상관없다고 했지 싫다곤 안했잖아."

 

 

이게 진짜. 루미너스가 입을 다물며 사납게 팬텀을 쏘아보자 괜스레 곁에 있던 반 친구들이 슬금슬금 둘 사이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험악한 루미너스의 분위기와는 반대로 팬텀은 여전히 유들거리며 짙게 웃었다.

 

 

"알았어. 대신 그렇게 싫으면 마지막으로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줘."

"싫다."

"아, 나도 이렇게 치사하게 나가긴 싫은데."

 

 

루미너스가 단칼에 팬텀의 제안을 거절하며 몸을 돌리려하자 팬텀은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면서 짓궂게 웃었다.

 

 

"그동안 초콜릿 맛있었어?"

"......"

"내가 우리 샌님한테 주려고 스위스에서 공수해 온 건데. 어땠어? 사탕도 네가 좋아할 것 같은, 너무 달지도 않으면서 산뜻한 맛으로 특별히 주문제작한 거였는데 말이야."

 

 

루미너스가 눈매를 날카롭게 좁히며 팬텀을 노려볼 즈음 팬텀은 책상 위로 쏟아져 내린 초콜릿과 사탕을 그 긴 손가락으로 헤집다 얇은 색색의 비닐로 쌓인 사탕을 하나 집어 올렸다. 연한 푸른빛의 껍질에 쌓인 사탕은 루미너스가 가장 좋아하는 맛이었다. 끝이 발갛게 물든 손가락이 껍질을 벗겨낸 뒤 흰 알맹이를 드러낸 사탕을 집고는 그대로 붉은 입술을 가르며 빨간 혓바닥 위로 밀어 넣었다. 팬텀의 한쪽 볼이 작은 사탕의 모양대로 부푼 것을 보고나서야 루미너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작은 것도 받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렇지만 2주 동안 교과서가 든 공간을 제외하곤 빈 공간을 가득 채웠던 사탕과 초콜릿을 버릴 수도 없었으니 결국은 이리 될 일이었다. 하는 짓도 꼭 좀도둑처럼 치사하기 그지없지. 루미너스는 결국 음절을 하나하나 짓씹듯이 내뱉으며 팬텀이 원하는 답을 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와 어디를 가면 되지?"

 

 

 

***

 

 

 

 

루미너스는 휴대폰에 뜬 메시지들을 괜스레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도 들여다보고 있었으나 괜스레 신경 쓰여 계속 볼 수밖에 없었다.

 

 

 

[학원 어디 다녀?] 18:32

18:35 [OO학원]

[몇 시에 끝나는데?] 18:35

18:39 [오후 9시]

[그럼 내가 학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끝나고 보자 ㅎㅎㅎㅎ] 18:39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같은 학교, 같은 교복을 입고 다닌다 하더라도 루미너스는 팬텀과 다른 세계에 산다고 생각했다. 그저 분위기만이 아니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러했다. 아름다운 자에겐 아름다운 게 걸맞았다. 그리고 팬텀에게 어울리는 아름다운 것들 중에 루미너스, 그는 없었다. 왜냐하면 루미너스는 팬텀이 원하는 것과 정반대의 아름다움을 추구했으니까. 하지만 루미너스의 기대와는 달리 팬텀은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에게 다가왔고 루미너스가 그어뒀던 선을 맘대로 드나들었다. 거슬렸다. 짜증났다. 그러나. 그럼에도.

 

루미너스는 학원 벽면에 붙은 시계를 바라봤다. 이제 시침은 분침이 두어 걸음만 더 걸으면 9에 다다를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비록 숙제거리는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루미너스는 천천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펼쳐져 있던 문제집이 닫히고, 샤프가 필통으로 들어가는 일상의 모습들이 낯설었다. 긴장인지 설렘인지 모를 감정들이 심장을 두들겨댔다. 루미너스는 책상 위의 것들을 가방 안에 쓸어 담듯이 넣어버리곤 지퍼만 겨우 잠근 후 가방을 어깨에 대충 걸친 채로 계단을 뛰듯이 내려갔다.

 

층계를 내려갈 때마다 그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에 맞춰 노란 불빛이 탁, 탁 켜지며 루미너스의 어두웠던 앞길을 밝혀주었다. 미끄러지듯 층계를 내려오던 루미너스는 학원 건물 입구에 기대듯 서있는 인영을 발견하곤 굳은 듯 서버렸다. 입 밖으로 넘치는 숨결이 가팔랐다. 메마른 입술 위를 촉촉한 혀가 훑었다. 루미너스는 흐트러진 숨을 가다듬으며 느릿하게 팬텀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샌님! 언제 나왔어. 내가 메시지 보냈는데 확인했어?"

"...아니."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뭐 중요한건 아니니까, 됐어. 자, 가자!"

"자, 잠깐. 어딜 가려는 거지?"

 

 

성큼성큼 다가온 팬텀이 대뜸 루미너스의 손목을 붙잡고 끌어당기자 루미너스가 당황하며 물었다. 어딘가로 향하던 팬텀은 그런 루미너스를 돌아보며 반짝이는 자안을 초승달마냥 휘었다.

 

 

"-같이 별 보러."

 

 

 

...라는 말을 한 것치고 팬텀이 루미너스를 이끈 곳은 어느 건물의 옥상이었다. 5층밖에 되지 않는 건물이었지만 엘리베이터가 없어 루미너스는 가쁜 숨을 내뱉으며 팬텀을 노려봤지만 저 잘생긴 얼굴엔 얄밉게도 땀을 흘린 흔적조차 없이 뽀송하다. 그 와중에 잠겨있지 않은 옥상은 또 어떻게 찾았는지 궁금했지만 루미너스는 질문을 마른 침과 함께 삼키며 숨을 골랐다. 팬텀은 그저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옥상의 한쪽에 놓인 낡은 흔들 그네에 루미너스를 앉혀놓곤 제가 매고 온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위해 부스럭거렸다.

 

 

"...별 보러 가자더니."

"응."

"별이 보이긴 하나?"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곧 별 보여줄 테니까."

 

 

루미너스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늘은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어두웠지만 하늘 위로 보이는 거라곤 반쯤 차오른 상현달 밖에 없었다. 간혹 저게 별인가, 싶은 것들이 하늘에서 반짝였지만 조금씩 움직이는 걸 보아하니 별은커녕 비행기거나 인공위성일 확률이 높았다. 주변 옥상들을 둘러봐도 화려한 간판들만이 번쩍거리고 있을 뿐, 도저히 별을 볼만한 곳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 도심 한 가운데서 별을 보겠다는 발상이 우스운 거였다.

 

하지만 루미너스는 팬텀에게 무어라 말을 덧붙이는 대신 입술만 몇 번 달싹이다 잠자코 기다렸다. 그 와중에 팬텀은 준비가 다 끝났는지 기다란 무언가를 들고 와 루미너스의 손에 들려줬다.

 

 

"짜잔."

"...이건 불꽃놀이할 때 쓰는 거지 않나? 스파클라였던거 같은데."

"뭐야 샌님 이거 이름도 알아? 모를 것 같았는데."

 

 

입으론 투덜거리면서도 연신 웃는 낯의 팬텀은 뒷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능숙하게 불을 붙였다. 팬텀은 루미너스의 스파클라에 불을 붙이곤 제 것에도 마주 붙이더니 그대로 루미너스 옆에 앉았다.

 

 

"설마.. 이게 별이라 하진 않겠지?"

"맞는데. 이거 봐 예쁘잖아. 하늘에 있는 별보다 훨씬."

 

 

이리저리 불꽃이 튀어 오르며 어둑했던 옥상을 환히 밝히는 걸 가만히 보고 있자니 팬텀의 말대로 예쁘긴 했다. 화려한 불꽃이 야금야금 손잡이 쪽을 향해 번지면서도 타오르는 불티는 보이지 않는 밤하늘의 별들보다 더 찬란히 반짝였다.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곳이 하늘인거야. 그리고 우리는 그 별을 코앞에서 보고 있는 거고."

 

 

루미너스는 팬텀의 말을 들으며 무언가 홀린 듯이 점점 사그라지는 불빛을 아쉽게 바라보았다. 거셌던 불꽃은 잠시뿐이라는 듯 금방이라도 꺼질듯이 위태로워 보였지만 팬텀은 그 사이에 또다시 새 스파클라를 꺼내며 까맣게 다 타버린 루미너스의 것을 바꿔주었다.

 

 

"어때."

 

 

-예쁘지?

 

루미너스는 팬텀에게 새 스파클라를 건네받을 때 스친 팬텀의 손에 몸을 떨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팬텀의 손은, 따듯했다. 루미너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팬텀을 가만히 바라봤다. 주황빛 불빛에 번진 금빛 속눈썹에 빛망울이 아롱지며 찬연히 반짝이고, 새하얀 낯빛에 번진 불꽃의 빛무리가 그를 따사로이 물들였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돌리던 팬텀이 루미너스와 두 눈을 마주치자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그는 환히 미소 지었다. 아. 루미너스는 무언가가 떨어지는 듯 했다.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어. 샌님은 왠지 이런 거 안 해봤을 거 같았으니까. 이렇게 예쁜데."

"......"

"샌님과 잘 어울리지 않아? 어둠 속에서도 이렇게 반짝반짝 빛난다는게?"

"...헛소리."

 

 

루미너스는 간신히 메인 목을 억지로 움직여 대답했다. 팬텀은 퉁명스런 루미너스의 답에도 그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웃을 뿐이었다.

 

 

"사실 처음엔 그저 나랑 완전 다른 사람 같은 샌님에 대한 호기심이었는데. 이렇게 진심이 될 줄은 몰랐지."

"......넌 너무 끈질겼어."

"하하, 알아. 그게 내 장점인걸. 전에도 말했잖아. 난 가지고 싶은 건 가져야 성미가 풀린다고."

 

 

팬텀은 사그라드는 제 스파클라를 바닥에 던져놓곤 새 스파클라를 꺼내더니 루미너스에게도 하나 쥐어준 뒤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치지직-, 끝에서부터 찬연히 피어오르는 불꽃은 정말이지 눈이 시리도록 밝았다.

 

 

"아름다운 자에겐 아름다운게 걸맞다고 하지."

"음."

"넌 내게 걸맞은 사람이 아니었어."

"당연하지, 샌님. 샌님은 내게 걸맞은 사람이 아니야."

 

 

팬텀은 천천히 고개를 루미너스를 향해 숙이며 나직이 속삭이듯 읊조렸다.

 

 

 

"나같이 아름다운 사람이 그만 나보다 더 아름다운 샌님의 빛에 취해 이 귀한 걸 손에 넣기 위해 발버둥친 거지."

 

 

루미너스는 제 입술에 와 닿는 따뜻한 체온에 그저 두 눈을 감았다. 멋대로 제 세계를 침범한 무뢰한은 이제 그의 심장까지 침범해놓고 그의 세계를 뒤흔드는 원인이 되었지만 어쩐지 루미너스는, 이대로 놔두고 싶었다. 찰나의 일탈이 그의 세계를 이리 뒤집어놓을 줄 몰랐지만 그는 동시에 예감하고 있었다. 어쩌면 누군가가 이렇게 그를 뒤집어주길 기대했던 것일지도 모르지. 늘 정해진 길만 걷던 루미너스가 제 길에서 이탈한 순간부터 어쩌면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덧없지만 소중하기 그지없는 감정이.

 

두 사람의 손에 들린 마지막 별이 소멸될 때까지 둘은 서로의 세계의 경계선에 서서 호흡을 나눠가졌다. 처음 맛본 타인의 호흡은 달디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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