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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est

w. 하람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것을. 매년 생일마다 팬텀이 받았던 장미꽃 한 송이에 묶인 리본에는 그 한 문장이 언제나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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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세상에 태어난 날에 죽었다. 어느 겨울날 대적과의 전투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대신해 희생한 팬텀은 한 점 후회도 없다는 듯 환하게 웃는 얼굴로 생을 마쳤다. 전쟁이 끝나고 대륙에 평화가 찾아온 후에나 겨우 치를 수 있었던 장례식은 영웅 몇 명만이 모여, 아름답고도 화려했던 그의 일생과는 다르게 수수했다. 생전의 연인은 그의 장례식에 흰 국화 대신 붉은 장미꽃 한 송이를 가져갔다. 다른 사람이라면 의문을 가졌을 만한 선택이었지만 의구심을 갖는 영웅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이후 매년 팬텀의 기일엔 무덤 근처가 꽃밭으로 보일 만큼 많은 장미꽃이 있었다.

곱게 다듬어진 에우렐의 장미와 짐승 손이 닿은 흔적이 있는 여우마을의 장미, 투박한 손길이 그대로 담긴 리엔의 눈 묻은 것, 사시사철 따스한 헤네시스의 잎이 큰 것과 커다랗게 자란 나무들 틈에서 자라 상대적으로 작게 보이는 엘리니아의 장미까지. 강과 바다가 몇 번이고 변할 시간이 지난 후 꽃을 가져다 놓던 손의 주인들도 세상을 떠나 무덤 곁에는 곱게 다듬어진 장미와 봉우리가 작은 것밖에는 남질 않게 되었다. 비석이 깎이고 갈려 묘비에 적힌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즈음엔 그마저 손길이 끊겨, 이제는 엘리니아의 작은 장미 한 송이밖에 남질 않았다. 잡초를 뽑고, 야생 몬스터가 파헤치지 않도록 울타리를 세우고, 장미꽃을 올려 두는 그 손에는 주름 하나 없었다. 빛의 힘으로 초월자가 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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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유독 매서웠던 어느 해, 루미너스는 그저 눈더미에 파묻힌 줄로만 알았던 장미 한 송이를 가져간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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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니아를 지탱하는 거대한 나무들이 칙칙하게 색이 죽었다. 겨울이 오는 소리였다. 은둔생활을 하던 루미너스는 솟아오른 나무 근처의 숨겨진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매년 그래왔듯 그의 무덤에 올릴 장미를 꺾으러 북쪽 나무숲을 헤매던 때, 바스락, 제 것이 아닌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어린아이가 울창한 숲에서 그만 길을 잃은 모양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커다란 나무 기둥 뒤에 어설프게 숨은 작은 인영을 볼 수 있었다. 이질적일 정도로 하얀 사람을 보고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나쁜 사람이 아니니 이리로 나오세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었나요?”

근방에는 약한 몬스터 밖에 나오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에게는 충분히 위험할 수 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경계심을 풀었는지 기둥 뒤에서 쭈뼛쭈뼛 이리로 나오는 아이와 눈을 마주친 순간 그는 정수리부터 못이 박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탁한 모래 빛 금발과 깊은 보라색 눈은 루미너스에게 있어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 내가 어떻게 너를 잊겠어. 팬텀.

“엥, 형이 제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아, 아…”

무심코 소리 내어 그의 이름을 불렀었던 모양이다. 루미너스는 급히 입을 틀어막고는 아이를 등지고 섰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팬텀이 그를 부르고 나서야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줄 수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는 게 다였지만. 높게 솟은 나무들 사이로 팬텀이 점이 되어 사라지고 나서야 루미너스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모든 일을 물리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오늘 마주쳤던 아이를 떠올리자 어쩐지 목구멍이 버석버석하게 갈라졌다. 그의 무덤 곁에서는 억지로 짜내려 해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이제서야 흐를 것만 같았다. 한 송이 한 송이 바친 장미꽃이 그대로 쌓여 제 속을 꽉 틀어막고 있던 것일까,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 터져 나오는 꽃잎과 같았다. 루미너스는 억지로 막았던 마음을 비워내며 아주 오래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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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형아란 말야… 엄마가 그 숲은 저주받은 숲이라고 했는데, 그 형아는 거기 사는 것 같았어.”

나랑 똑같이 길을 잃어버렸다고 하기엔 옷이랑 신발이 너무 깨끗했잖아? 그리고 몇 시간을 헤매도 집에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는데 단번에 마을로 향하는 방향을 짚어 주다니. 그것도 선생님한테 혼나서 울기 직전인 얼굴로. 어, 설마 귀신의 집에 사는 형인가?! 그날 밤 꼬마 팬텀의 작은 머릿속에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쉬이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팬텀도, 루미너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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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마주침 이후 팬텀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루미너스의 집 근처 숲에 갔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말리지는 않았는지 묻자, 당당하게 몰래 왔다고 하는 모양새는 예전과 다를 바가 없어 루미너스도 무심코 웃음을 지었다. 처음에 보인 경계심은 어디로 갔는지 이제는 마을 어른들보다 저를 더 따르는 듯했다. 따뜻한 코코아가 든 잔을 들고서는 잘려 나간 나무 밑동에 앉아 발을 콩콩 구르는 팬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준 루미너스는 짐짓 엄한 척을 했다.

“어른들이 가지 말라고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요, 꼬마 도련님. 괴물한테 잡아 먹히면 어쩌려고?”

“그렇지만 여기 사는 건 형 한 명뿐이잖아? 몬스터라고 해도 슬라임이나 페어리가 전부인데, 괴물은 무슨! 어른들은 전부 바보란 말야.”

꼬마 도련님은 말을 들을 생각이 죽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점도 예전과 다를 바 하나 없네. 동그랗게 바닥이 보이는 컵을 받아 든 루미너스가 팬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해가 질 시간이에요.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난 팬텀은 그렇게 말하는 루미너스의 말은 들은 척 만 척 머뭇거리며 발끝으로 애꿎은 이끼만 짓이겼다. 할 말이 있냐는 듯 쪼그리고 앉아 시선을 마주치고 고개를 갸우뚱하자 그제야 팬텀이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매일매일 숲에 오는 걸 부모님이 알아버려서 마법사 대장 할아버지한테 말했나 봐. 오늘 오기 전에 마법 도서관을 잠깐 들렸다가 들었는데, 할아버지 얼굴이 엄청 무서워지더니…”

“무서워지더니?”

“아이에게 큰일이 생기기 전에… 마을을 떠나라고 하는 말을 들었어.”

천년도 더 전에 사라진 대륙의 어둠이 남긴 파편이 북쪽 나무숲 깊은 곳에 살고 있다고, 또 늙지도 죽지도 않는 그 어둠은 솟아오른 나무 근처에 숨어들었다고. 마을에 제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는 루미너스도 대충 알고 있었다. 그 정체가 어둠이 아니라 빛이라는 것만 빼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씁쓸하게 웃은 루미너스가 손을 뻗어 팬텀을 꽉 안았다. 작디작은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억눌린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는 그렇게 말했다. 집에 갈 시간이야, 팬텀. 다시는 숲으로 돌아오지 마. 루미너스의 옷깃을 꽉 붙잡은 팬텀의 목소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렸다.

“…형? 거짓말이지? 어른들이 일부러 겁주려고 한 소리인 거 다 알아.”

슬프게 웃는 루미너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팬텀의 손에 꽃봉오리가 작은 장미를 한 송이 꼭 쥐여줬을 뿐이었다. 숲이 닫히는 가운데로 루미너스는 등을 돌려 걸어갔다. 팬텀이 그를 쫓으러 달려가려 하자 포근한 빛의 무리가 허공에서부터 나타나 두 다리를 감쌌다. 몸을 점점 감싼 빛은 이내 시야를 가렸고,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 그것이 사라졌을 때 팬텀은 마을 입구에 서 있었다. 두 손에는 눈물이 묻은 장미를 꼭 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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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저주받은 숲에 갔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팬텀의 부모님들은 서둘러 짐을 챙겨 거주지를 옮겼다. 나무 따위는 고사하고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사막으로. 그리고는 십여 년을 그곳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남의 눈을 피해 잘 말려 보관해둔 장미를 볼 때마다 팬텀은 이따금 루미너스가 생각나곤 했다. 그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지는 날에는 무슨 연유에선지 꿈에 그를 볼 수 있었다. 다만 처음 만났을 때와는 조금 다른, 짧은 머리의 더 앳된 모습이 마치 스물을 갓 넘긴 청년 같았다. 꿈에서 루미너스는 저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팬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친근한 별명으로 부르며 시시콜콜한 장난을 치고 때로는 함께 전투하기도 하고, 풍성한 꽃다발을 선물하기도 하고 애틋하게 사랑을 하기도 하고. 다른 어느 날 밤에는 눈 쌓인 무덤 앞에서 장미 한 송이를 안고 우는 자기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본 적도 있었다. 단순한 꿈이라 넘기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많았다. 그런 밤들이 지나고 나면 항상 팬텀은 생각했다. 꿈속의 나는 누구일까.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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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너스는 팬텀이 떠난 이후, 멈췄던 시간을 다시 세기 시작했다. 지금쯤이면 네 정수리가 턱 끝까지는 닿겠지. 이제는 네가 내 키를 넘어섰겠구나. 품에 안기면 가슴에 닿은 뺨에서 네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까지 컸겠지. 마치 그 시절처럼. 불멸자의 모든 시간은 필멸자를 기준으로 하여 흘러갔다. 열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겨울이 흘러간 어느 해의 마지막 달, 루미너스는 어렴풋이 시간을 세어봤다. 네가 죽었던 그 나이만큼 자랐겠구나. 팬텀의 생일이자 기일에 수도 없이 장미를 바쳤지만, 올해처럼 마음이 먹먹해진 적은 없었다. 그가 세상에 살아있었고, 설사 생이 다해 죽는다고 해도 환생의 궤도에 올라탄 이상 삶의 고리는 하나하나 늘어나 긴 사슬이 될 것이란 것은 불 보듯 선명한 일이었다. 이제는 무덤에 올리는 꽃은 의미가 없었다. 그를 위한 꽃은 올해로 끝이라 다짐하며 가꾼 장미에는 눈물이 섞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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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다가온 팬텀의 생일에 루미너스는 늦잠을 잤다. 수백 번도 더 반복한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허무했지만, 종결의 의미를 아는 루미너스에게는 더욱 상실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 축축해진 베개가 보기 싫어 뒤집어 두고서는 책상에 앉아 기다란 리본끈에 항상 써왔던 한 문장을 적었다.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것을.

“내 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너였어, 팬텀.”

이번 생과 앞으로의 무수한 삶 동안에는 나와 마주치지 않고, 희생할 일을 맞닥뜨리지도 않고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아줘. 루미너스는 긴 시간 그 꽃을 들여다보다가 책상에 흩어진 잔가시를 정리하고 정성스레 리본을 묶어 마지막을 준비했다. 오늘따라 무덤까지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가며 한걸음, 다시 한걸음 바닥을 보며 걸으니 제 것이 아닌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는 사람이 없는 장소에 남은 타인의 흔적에 긴장하며 무덤가에 들어선 루미너스의 시야에 들어온 건 하얀 눈밭에 서 있는 금발의 청년이었다.

“…팬텀?”

설마 하며 부른 이름이었지만 이리로 곧장 달려와 저를 품에 꽉 끌어안는 행동은 의문을 확신으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꽉 막힌 목소리로 루미너스, 루미너스 하며 저를 몇 번이고 부르는 팬텀을 일단 다독거리며 떼어내고서야 루미너스는 팬텀이 들고 있는 말린 장미꽃을 볼 수 있었다.

“네가 여긴 어떻,”

“모두 기억났어. 너는 누구였고, 우리가 어떤 관계였는지… 네가 왜 장미꽃을, 매년…”

팬텀은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루미너스를 끌어안았다.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에서는 눈물 냄새가 났다. 한참 동안 서로를 부둥켜안고 서 있다 떨림이 잦아든 후에야 둘은 눈이 쌓이지 않은 나무 둥치에 앉았다. 팬텀은 손에 쥔 마른 장미 가지를 만지작거리며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꿈에 자꾸만 네가 나왔어. 숲에서 만난 하얀 형이 아니더라고? 많이 고민했어. 너는 누구였길래 자꾸만 내 꿈에 나오는 걸까. 전생에 옷깃이라도 스쳤나?”

이전 생의 이야기를 꺼내자 다시금 죄책감이 차오르는지 바닥만 바라보던 루미너스의 뺨을 양손으로 붙들어 눈을 마주친 팬텀이 웃었다. 태양같이 웃는 그 얼굴은 셀 수 없는 시간이 흐른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참 신기하지? 딱 이 나이가, 이날이 되어서야 모든 게 생각이 나다니. 샌님이랑 못 해본 거 다 해보라고 초월자가 준 선물일까?”

아.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린 루미너스가 마지막으로 준비했던 장미를 팬텀의 손에 쥐여줬다. 그리고는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를 따라 웃으며 말했다.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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