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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w. 브루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것을.

 

팬텀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아름다운 것... 루미너스는 속으로 문장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루미너스가 보기에도 팬텀은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잘생긴 사람. 누구에게 물어봐도 팬텀의 외모가 뛰어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 팬텀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팬텀의 말대로라면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것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팬텀에게는 아름다운 것을 선물해야 했다.

 

그럼 루미너스가 왜 팬텀의 선물을 고민하고 있느냐, 간단했다. 얼마 전 팬텀과 나간 임무에서 저 대신 팬텀이 다쳤기 때문이다. 잠깐의 방심이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마력이 저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다가올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찰나의 순간, 뒤로 잡아 당겨지는 감각과 함께 누군가가 저를 감싸 안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제게 쏟아지는 붉은빛의 액체와 함께 역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눈을 뜨자 익숙한 얼굴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순간 모든 사고가 멈춘 것만 같았다.

 

아니 멈춘 것이 맞을 것이다. 너무 놀란 나머지 루미너스는 자신의 치유 스킬도, 팬텀의 고유 스킬도 생각하지 못한 채 그저 굳어 있었다. 이어 연두색의 마력이 팬텀을 감싸지 않았더라면, 루미너스는 뒤이어 날아온 마력에 팬텀의 희생이 헛되게 그대로 다쳤을지도 몰랐다. 겨우 정신을 차린 루미너스는 팬텀을 데리고 그대로 전장을 이탈했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피를 흘린건지 흰옷 전체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눈앞에서 동료를 잃을 뻔했다는 생각에 손이 덜덜 떨렸다. 럭 오브 팬텀시프, 팬텀의 스킬이 아니었다면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헛구역질이 일었다.

 

멀리서 상황을 보고 급히 동료들이 달려왔다. 표정에서부터 그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었다. 높은 민첩과 회피 덕에 적에게 피격당할 일조차 거의 없었던 팬텀이 이런 기본적인 임무에서 다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특히 오늘처럼 크게 다친 상황은 그들로서도 처음이었다.

 

울상이 된 에반에게 태연하게 자신은 괜찮다며 손을 휘젓는 팬텀은 언제나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정말로? 걱정스러운 얼굴로 은월이 물었다. 보시다시피 멀쩡해. 역시 죽음도 피해 가는 행운이네. 아란이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농담을 건넸다. 팬텀이 어깨를 으쓱했다. 동료들에게 둘러싸인 팬텀을 루미너스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 시선을 느낀 건지 팬텀이 고개를 돌렸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자 팬텀이 루미너스에게 다가왔다.

 

“괜찮아?”

 

팬텀이 손을 뻗어 루미너스를 일으켜 세웠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직도 손이 떨리고 있었다. 가만히 손을 내려다보던 팬텀이 떨리는 손을 마주 잡았다. 루미너스의 몸이 흠칫 떨렸다.

 

“많이 놀란 것 같은데,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팬텀의 말에 루미너스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왜 화를 내지 않지? 왜 나를 걱정해? 내가 방심한 탓인데? 네 스킬이 아니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만약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끔찍한 상상이었다. 그런데 너는 뭐가 그렇게 여유로워서 나를 걱정하지? 나 대신 네가 왜 다쳐? 이유를 알 수 없는 화가 끓어올랐다. 맞잡은 손을 뿌리치고 루미너스는 팬텀에게 소리쳤다.

 

“네가 아니라 내가 다쳤어야 했어!”

 

그 말에 팬텀은 표정을 굳혔다. 방금까지도 걱정스럽게 저를 바라보던 팬텀의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어쩐지 화가 난 듯 보였다.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그럼 네가 거기서 죽기라도 했었어야 한다는 거야?”

 

그 후 무어라 변명도 하기 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팬텀 때문에 남겨진 자리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남았다. 멍하니 팬텀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는 루미너스에게 메르세데스는 루미너스, 네가 잘못했어. 라며 못을 박아버렸다. 그 탓에 루미너스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껏 자신을 대신해 다쳤는데 화를 낼 게 아니라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 했다 싶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사라질 건 아니었잖아. 자신이 잠깐 방심한 탓에 일어난 일이니, 팬텀이 아니라 자신이 다쳤어야 하는 게 맞다. 아무리 스킬이 있다고 하더라도. 살아날 수 있다고 해서 다쳐도 되는 건 아니잖아. 우리가 언제부터 서로를 감싸는 사이였다고? 나한테도 회복스킬은 있거든? 변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억울함이 고개를 들었지만 그보다는 죄책감이 컸다. 저 대신 다친 팬텀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사과할 방법을 생각하느라 루미너스는 그날 밤을 새웠다.

 

“어제 일은 내가 미안했다.”

 

루미너스는 다음 날 팬텀을 찾아가 정식으로 사과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자. 내가 잘못한 일이니까. 루미너스는 그렇게 마음먹었다. 제 앞에서 고개를 숙인 루미너스를 빤히 내려다보는 팬텀은 여전히 냉랭했다.

 

“루미너스, 네가 사과하는 이유는 알아?”

“...”

“이유도 모르는 사과를 왜 하는데?”

 

미안한 마음을 티끌마저 남기지 않고 싹 사라지게 만드는 말투에 금세 울컥한 루미너스가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을 뱉어내기 전, 둘을 지켜보던 은월이 루미너스를 얼른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왜 막았어?”

 

루미너스가 분함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억울함을 담아 외쳤다.

 

“그래도 팬텀이 대신 다친 거잖아. 사과하러 온 거 아니었어?”

 

은월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렇지, 참. 할 말이 없었다. 예전부터 은월에게는 왠지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덕분에 화를 가라앉힌 루미너스는 침착하게 말했다. 말려줘서 고마워.

 

“사과, 다시 해야겠지.”

“응. 선물도 준비해서.”

“선물?”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

 

아, 은월의 말에 루미너스는 입을 작게 벌렸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래, 그랬었지... 루미너스는 겸허히 은월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가뜩이나 저 때문에 다친 팬텀이다. 생일선물에 미안한 마음을 더해 선물을 좋은 것으로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사과도 건네야지. 다시는 저 대신 다치지 말란 말도 함께.

 

저 까다로운 팬텀의 취향에 맞는 선물이 뭐가 있을까. 괴도라는 이명에 걸맞게 팬텀의 심미안은 대단했다. 아무거나 골라갔다간 어제처럼 대차게 까일 것이 자명했기에 루미너스는 며칠째 머리를 쥐어 싸매고 있었다. 아름다운 게 뭐야? 화려하고 비싼 거? 팬텀의 평소에 뭘 좋아했지? 생각해보면, 팬텀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새삼스럽게도 루미너스는 팬텀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팬텀이 좋아할 만한 선물이 뭐가 있을까요?”

 

결국 루미너스는 조언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사라면 주인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이 아닌가,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기대감이 담긴 루미너스의 시선에 알프레드는 곤란한 듯 미소지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크리스탈가든에 몰래 방문한 이 깜찍한 손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냥 본인을 선물로 주시면 될 텐데요. 속에 있는 말을 삼킨 채 알프레드는 그저 허허, 웃을 뿐이었다. 루미너스가 멋쩍은 듯 목덜미를 쓸었다.

 

“그래도 동룐데 별로 아는게 없네요.”

“지금부터라도 알아가시면 될 듯합니다. 선물이라고 하니... 차를 좋아하시긴 합니다만.”

“차, 말입니까?”

“그 차가 아니라 타고 다니는 차 말입니다.”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유심히 바라보는 루미너스에게 고개를 저은 알프레드는 주인님께서는 특별 주문한 오픈카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며 쓸데없는 정보까지 알려주었다. 새삼 팬텀의 취향이 까다롭다는 걸 다시 확인한 루미너스의 표정이 조금 침울해졌다.

 

“혹시 선내를 조금 둘러봐도 될까요?”

 

어딘가 돌아다니다 보면 팬텀에 관한 정보를 모으기 쉬울지도 모르지. 그렇게 판단한 루미너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알프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주인님의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면요.”

 

덧붙이는 말에 루미너스가 당연히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허락을 받고 응접실을 나온 루미너스는 알프레드와 함께 복도를 걸었다. 길게 늘어선 복도에는 빈 객실과 수집품을 담은 창고들이 가득했다. 중앙홀로 나오자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이 보였다. 2층으로 올라서자 알프레드가 가장 오른쪽 방은 팬텀의 침실이며 두 번째 방이 정보관리실이라 이야기해 주었다.

 

침실을 잠깐 바라본 루미너스가 옆에 있는 정보관리실에 시선을 두었다. 정보관리실이라, 들어본 적이 있었다. 팬텀이 고용한 정보분석가들이 각지에서 모인 정보원들의 정보를 조합한다고 했던가. 팬텀에 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방으로 들어서자 장작 타는 소리와 함께 타자기 소리가 들려왔다. 두 명의 여인이 마주 앉은 테이블에는 서류 더미가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루미너스가 들어서자 빠르게 들려오던 타이핑 소리가 멎었다. 고개를 들고 저를 바라보는 두 쌍의 눈동자에 루미너스가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뒤따라온 알프레드가 그녀들을 소개했다.

 

“정보수집가 마오와 정보분석가인 크리스틴입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넨 후 자기 소개를 어떻게 해야할지, 본론을 바로 꺼내도 될지를 고민하던 중에 금발의 여인이 먼저 말을 건넸다.

 

“루미너스님이시군요?”

 

어떻게 알았냐는 듯 루미너스의 눈이 동그래지자 여인이 가볍게 미소지었다.

 

“하얀 제복에 양쪽이 대칭을 이루는 무기, 샤이닝로드를 다루는 사람. 그리고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을 만큼 주인님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영웅 루미너스님 뿐이죠. 정보를 다루는 사람이 이런 기본적인 정보 파악도 못 하면 정보분석가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군요. 루미너스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그런데 저희에겐 무슨 일이시죠?”

“아시겠지만 곧 팬텀의 생일이라 혹시 어떤 선물이 좋을지 조언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요.”

“그런 거라면, 희귀한 정보야말로 최고의 선물이죠.”

 

마오와 크리스틴이 입을 모아 말했다. 따로 정보분석가까지 고용하는 팬텀이다. 팬텀이 정보를 얻기 전에 루미너스가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을 리가 없었다. 루미너스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정보는 저보다 팬텀이 더 잘 다루니까요. 혹시 개인적인 기호 같은 건...”

“개인에 관한 정보는 알려드릴 수 없어요. 사장님에 대한 정보라면 더더욱.”

“루미너스님 본인에 대한 정보는 알려드릴 수 있는데요.”

 

살벌한 농담이 섞인 칼 같은 거절이었다. 개인의 기호도 사적인 정보기는 하지... 정보관리실에서도 얻을 수 있는 소득은 없어 보였다. 다른 곳을 둘러봐야 할 것 같았다.

 

“저, 아무래도 보석 아닐까요? 최근에 주인님이 관심을 보이시던 보석이 있거든요.”

 

방을 나가려는 찰나, 차를 따르던 쇼콜라가 말을 보탰다. 쇼콜라의 말에 루미너스의 고개가 들렸다.

 

“무엇입니까?”

 

루미너스의 말에 쇼콜라가 잠시만 기다려달라며 방 밖으로 나가더니 팜플렛을 들고 들어왔다.

 

“최근 경매장에 올라온 펜던트에요! 퍼플 사파이어가 메인인데 엄청 유심히 보고 계시더라구요.”

 

역시 보석에 관심이 많나? 팜플렛을 받아든 루미너스는 팬텀의 빌어먹게도 높은 안목에 찬사를 보냈다. 루미너스가 보기에도 괴도의 눈에 찰 만큼 펜던트는 아름다웠다. 그만큼 비싸고! 경매장에서 낙찰받은 금액을 살펴보니 0이 하나, 둘, 셋, 넷... 이게 얼마야? 척 봐도 예상을 넘어서는 금액에 팜플렛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 까다로운 취향에 맞는 선물을 드디어 찾아냈다만, 그래서 억을 어디서 구하는데? 루미너스는 고심했다. 책을 팔까. 집에 있는 서재를 떠올렸다. 그래도 마법서이니 돈이 좀 될지도 모른다. 이미 읽었던 거기도 하고, 내용은 제 머릿속에 다 있었으니까.

 

루미너스는 그날의 팬텀을 떠올렸다. 제 앞에서 무너지던 팬텀의 몸과 흰옷에 튄 낭자한 피. 그때를 다시 떠올리자 숨이 가빠오는 것 같았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다시는, 다시는 저 대신 희생하게 만들지 말아야지. 루미너스는 그런 일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사소한 말다툼은 으레 있어왔던 일이고, 여전히 저 대신 다친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미안함과 고마움을 모르지는 않는다. 루미너스는 팬텀에게 정말로 좋은 것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이왕이면 본인이 마음에 드는 것을 선물하는 게 좋잖아. 팬텀이 저 펜던트를 원했다면 어떻게든 선물해주고 싶었다. 어떻게 선물할지는 여전히 미지수였지만.

 

“저 펜던트라면 현재 멜츠의 손에 있다고 하더군요.”

 

고민에 빠진 루미너스에게 크리스틴이 말을 건넸다. 멜츠? 루미너스가 얼빠진 채로 반문했다.

 

“장신구 제작의 마스터예요. 마이스터 빌에서 봤을 텐데?”

 

아, 루미너스가 기억을 더듬어 남자를 기억해냈다. 화려한 복장에 느끼하게 생긴 남자였다.

 

“멜츠에게 보석을 사려면 고생 좀 할 텐데. 다른 보석이랑 교환하거나 더 큰 금액을 불러야 할 거예요.”

 

크리스틴이 충고했다. 감사합니다. 루미너스는 모두에게 인사를 하곤 서둘러 크리스탈가든을 떠났다. 마이스터빌에 도착하자 많은 이들이 모여있었다. 인파를 헤치고 멀리서도 보이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앞에서니 화려한 장신구를 진열해놓은 진열대가 보였다. 그 앞에 루미너스가 찾던 남자가 서있었다. 루미너스가 그에게로 다가갔다. 멜츠가 인기척을 느낀 듯 루미너스를 바라보았다.

 

“장신구 제작에 관심있어? ...그쪽은 그래 보이진 않는데.”

“얼마 전, 경매장에서 사파이어 펜던트를 낙찰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흠, 내가 산 게 맞긴 한데, 그걸 왜 묻지?”

“그 펜던트를 사고 싶습니다.”

 

그가 고개를 치켜든 채 루미너스를 아래위로 훑으며 말했다.

 

“흐음,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 취미는 보석 감상이야. 내 손에 들어온 보석을 왜 내가 넘겨야 해?”

“어떻게 살 수는 없을까요?”

“가진 돈은 많아? 낙찰가의 두 배를 내면 팔아줄게.”

 

루미너스가 침음을 흘렸다. 멜츠가 어깨를 으쓱했다. 볼일이 없으면 가 봐. 루미너스의 어깨가 조금 처졌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떡하지, 다른 걸 찾아봐야 하나? 팔짱을 낀 채 그런 루미너스를 훑어보던 멜츠가 말을 건넸다.

 

“그런데 당신, 모험가지? 조금 강해 보이는데. 내가 말하는 물건을 구해오면 펜던트랑 교환해줄 수도 있어.”

“정말이십니까?”

 

멜츠의 말에 루미너스가 급히 고개를 들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기대감 섞인 눈빛에 멜츠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실력에 자신이 있나 봐? 그래, 설산의 마녀라고 들어봤나? 엘나스에서 오래전부터 전설로만 전해지던 몬스터야. 당연히 허구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그녀를 봤다는 소문이 있어. 그녀의 눈물은 차갑지만 보석처럼 아름답다고 하던데, 실제로 보고 싶으니 그걸 구해와.”

 

설산의 마녀라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루미너스는 멜츠의 제안을 수락했다. 소문만 믿고 행동하는 것은 무모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루미너스는 급히 엘나스로 향했다. 엘나스의 추위는 여전히 매서웠다. 차가운 바람이 살을 에일 듯 몰아쳤다. 루미너스는 둘러쓴 망토를 여몄다. 눈보라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날씨에 엘나스를 돌아다니는 건 위험한 짓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눈이 그치길 기다렸을 터였다. 하지만 팬텀의 생일까지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하얀 입김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루미너스는 샤이닝로드를 꽉 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냉기가 느껴졌다. 끝없이 이어진 설원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발목까지 눈이 쌓여 발이 푹푹 빠졌다. 궂은 날씨 탓에 걸음이 자꾸만 느려졌다. 조금 더 들어가자 눈이 얼어 얼음 벌판이 되었다. 체온유지와 몰려오는 몬스터를 막아내는 것 만으로도 마력이 줄줄 빠져나갔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책감 탓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꼭 펜던트를 선물해야겠다는 오기만 남은 것 같았다. 이를 악문 채 샤이닝로드를 휘둘렀다. 

 

며칠이 지났다. 루미너스는 마을에 서 있었다. 추위 탓에 평소보다 힘겨운 여정이었지만 운 좋게도 원하던 걸 구할 수 있었다. 그 추위 속에서 존재하는지도 모를 마녀를 찾느라 엘나스 설산을 헤매고 다닌 기억에 다시 몸서리가 쳐졌다. 그래도 시간에 맞춰 구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텔레포트를 사용해 멜츠의 앞으로 이동한 루미너스가 가죽 주머니를 건넸다.

 

“당신이 찾던 얼음 눈물입니다.”

 

멜츠가 다시 올 줄 몰랐다는 듯 놀란 눈으로 루미너스를 바라보았다. 어, 그게... 잠깐 뜸을 들이던 그가 주머니를 루미너스 쪽으로 다시 밀며 고개를 저었다.

 

“팔렸어.”

“네? 언제...”

“한 두시간 전에.”

 

루미너스의 눈이 커졌다... 그게 팔렸다고?

 

“제게 넘기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낙찰가의 세 배를 준다고 하더군.”

 

멜츠는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네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그럼 어쩌냐는 태도였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으나 이미 팔아버린 건 어쩔 수 없다 싶었다.

 

“그럼 물건을 사간 사람이라도 알려주십시오.”

“글쎄,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아 하더군.”

 

낭패였다. 사실 구매자를 알게 되어도 루미너스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눈 앞이 캄캄해졌다. 어떡하지. 머릿속이 아까까지 밟고 있던 엘나스의 눈마냥 새하얘졌다.

 

“그런데 그거 나한테 팔지 않겠나? 값은 후하게 쳐주지, 어때?”

 

눈치없이 물어오는 말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들고 있던 주머니를 그대로 손에서 놓았다. 쨍그랑. 주머니 속의 얼음 눈물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명을 지르는 멜츠를 뒤로하고 그대로 마이스터빌을 나섰다. 며칠간의 고생이 헛수고가 되었다. 벌써 팬텀의 생일이 하루 앞이었다. 지금 당장 새로운 선물을 찾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결국 루미너스는 선물을 포기했다. 늦더라도 좋은 걸 다시 구해야겠다 싶었다.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네가 왜 여기있어? 집으로 돌아온 루미너스는 테이블에 한쪽 턱을 괴고 태연하게 앉아있는 팬텀을 보며 헛숨을 삼켰다. 팬텀은 집으로 들어오는 저를 발견하자 한 손을 가볍게 들어 제게 인사했다.

 

“요새 바빴나 봐? 나는 어디 사는 샌님 덕분에 다쳤는데 보러오지도 않고.”

 

팬텀의 말에 루미너스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나는 네 선물 때문에 바빴는데, 속에 말을 숨긴 루미너스가 그냥 일이 좀 있었다며 말을 돌렸다. 자신의 말에 팬텀이 가늘게 눈을 떴다. 샌님이 하는 일이야 뻔하지. 그렇게 말하는 팬텀은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 기분이 나빠보이는 기색은 아니었으므로 루미너스도 대꾸하지 않고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왔지?”

 

루미너스가 팬텀에게 물었다. 저를 빤히 바라보던 팬텀이 입을 뗐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무슨 일 있나?”

“꼭 일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잠깐 시간을 내줬으면 해. 식사라도 할까?”

 

루미너스의 고개가 기울었다. 팬텀이 먼저 식사를 제안하는 일이 있었던가? 그래. 루미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일 팬텀을 찾아가려 했었다. 미리 생일을 축하하면 되겠지. 선물을 구하지 못한 것을 사과도 할겸, 그때 임무에서도 미안하고 고맙다는 인사도 다시 하고.

 

“그럼 이따 데리러 올게.”

 

팬텀이 말을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팬텀이 다시 찾아온 것은 늦은 저녁이었다. 팬텀이 오기 전 마을에 들러 루미너스는 케이크를 사왔다. 선물이 없다고 해도 빈손으로 가는건 아니잖아요, 라니아의 충고 덕분이었다. 원래 사려던 건 케이크뿐이었는데 상인이 꽃을 권하는기에 보았더니 하필 장미꽃이었다. 장미가 잘 어울리긴 하잖아. 어쨌든 집으로 돌아오니 멀리 상공에 떠오른 크리스탈가든이 보였다. 얼른 들고 있던 케이크와 꽃다발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어디 다녀와?”

“그냥 마을에. 내가 늦었나?”

 

집에 도착하니 팬텀이 저를 마중 나와 있었다. 루미너스는 말을 돌렸다. 케이크를 숨기는 별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당일에 주고 싶었으니까.

 

“아니, 나도 방금 왔어. 이제 갈까?”

“그래.”

 

라니아와 짧게 인사를 한 후, 팬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배에 올랐다. 최근에 이곳에 자주 온다는 생각을 했다. 알프레드가 둘을 맞았다. 그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방에 들어서자 흰 천이 깔린 테이블이 마련되어있었다.

 

“식사를 여기서?”

 

팬텀이 어깨를 으쓱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방 안으로 들어섰다. 팬텀이 능숙하게 의자를 뒤로 빼주었다. 무척 생소한 기분이었다. 제가 자리에 앉자 팬텀이 맞은 편에 앉았다. 알프레드가 작은 종을 울리자 메이드들이 능숙한 솜씨로 음식을 날랐다. 테이블 위로 요리를 담아낸 흰 접시들이 가득 올라왔다. 생소한 음식들도 보여 호기심이 일었다. 제 앞에 놓인 요리를 포크로 찔러 입으로 가져갔다. 훌륭한 만찬이었다.

 

“맛은 어때?”

“좋아.”

“주방장이 실력발휘를 했지.”

 

“네 까다로운 취향을 맞추려면 당연히 실력있는 주방장이겠지.”

 

저도 모르게 팬텀의 말을 받아치고서야 멈칫했다. 시비를 걸러 온 게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바로 돌아왔을 비꼬는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팬텀을 바라보자 그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듯 시선이 맞닿았다. 팬텀이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삼일 전에도 널 만나러 왔는데 네가 집에 없었어.”

 

어디갔었어? 팬텀이 주제를 돌렸다. 삼일 전이라면 엘나스에서 한참 헤매고 있을 때였다. 루미너스가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엘나스에. 거길 왜? 차라리 시비를 걸지. 대답 대신 옆에 있던 잔을 들고 그대로 와인을 들이켰다. 와인까지 맛이 좋았다.

 

“...일이 있었어.”

“그렇겠지.”

 

팬텀이 알만하다는 듯 웃었다. 내가 뭘했는 지 어떻게 알아. 괜히 심술이 났다.

***

 

 

식사를 끝낸 후 팬텀의 손에 이끌려 다른 방으로 들어섰다. 긴 소파와 작은 테이블, 맞은 편에는 벽난로에 장작이 타고 있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아까 마시던 와인을 들고 와 나눠마셨다. 여전히 좋은 향이었다. 평화로웠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가? 매번 만나면 시비를 거느라 바빴던 것 같은데 서로에게 날이 서지 않은 대화는 의외로 괜찮았다. 주로 팬텀이 묻고 루미너스는 대답만 했지만.

 

 

어느새 와인병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근데 이거 거의 내가 마신 거 같지? 갑자기 핑하고 어지러운 기분에 문득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하늘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별빛만이 빛나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팬텀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자리라는 걸 상기했다. 설마 열두 시가 지난 건 아니겠지?

 

“지금 몇 시야?”

 

루미너스가 급하게 몸을 일으켜 팬텀에게 물었다. 팬텀이 마시던 잔을 내려놓고 저를 바라보았다.

 

“돌아가려고?”

 

루미너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그럼? 되묻는 말에 눈만 깜빡였다. 뭐라고 대답하지? 그냥 궁금해서...

 

“궁금해서 그래.”

“시간을 묻는다는 건, 나랑 있는 게 지루하단 건가?”

 

그런 뜻 아닌데. 답답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마주 바라보니 특유의 능글맞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게 확실했다. 오늘은 안 그러더니 또 왜이래. 슬쩍 올라오는 짜증을 누르고 천천히 대답했다.

 

“이제, 곧 네 생일이니까ㅡ.”

“그래서?”

“자정이 되면, 축하해주려고 그러는거잖아...!”

 

창피함에 말끝이 떨렸다. 아, 정말로 몰랐다는 듯 팬텀이 알프레드를 보고 시계를 가져올 것을 명했다. 열한시 사십칠분. 곧 자정이었다. 십삼분이 정말로 길었다. 루미너스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애꿎은 시계만 노려보았다. 괜히 말했어, 괜히 말했다고. 눈치껏 축하할걸. 속으로 후회를 수백번도 넘게 하는 사이 시곗바늘이 열두시를 가르켰다.

 

“팬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시계를 슬쩍 본 팬텀이 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 짧게 한숨을 내쉰 루미너스가 말했다.

 

“생일 축하해.”

“그래서, 축하한다는 말뿐이야? 선물은?”

 

팬텀이 웃으며 물었다. 그제서야 인벤토리에 숨겨두었던 꽃다발과 케이크 상자를 꺼내 건네었다. 팬텀이 케이크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꽃다발을 안아들었다. 제가 건넨 꽃다발을 받아든 팬텀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장미꽃? 고백이라도 하려는거야?”

“그게, 뭐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리고 선물은 준비하려고 했는데...”

 

팬텀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반문했다. 루미너스가 뒷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팬텀은 인내심있게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루미너스의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보였다. 조금 마시긴 했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는 듯 보였다.

 

 

“네게 주려던 게 팔려버려서, 미안하다. 미처 다른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어. 조금만 기다려주면 안될까?”

 

눈썹을 아래로 휜 채로 미안하다는 듯 건네오는 루미너스의 말에 팬텀이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루미너스의 창피함은 배가 되었다. 안그래도 붉어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렇다고 그렇게 크게 웃을 일이야? 눈을 가늘게 뜨고 팬텀을 노려보았다.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평소와 달리 어딘지 모르게 다정했다. 이렇게 웃을 줄도 알았던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저번 일도 사과해야지.

 

“그리고, 저번 일은...”

“루미너스, 이리와.”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말을 끊은 팬텀이 루미너스를 불렀다. 뭐지? 루미너스가 팬텀쪽으로 조금 가까이 자리를 옮겼다.

 

“가까이.”

 

팬텀의 말에 루미너스가 몸을 일으켰다. 팬텀이 손을 뻗어 루미너스의 허리를 감싸 제게로 당겼다. 중심을 잃은 루미너스가 팬텀의 품에 안기다시피 넘어졌다. 팬텀이 들고 있던 꽃다발이 뭉개지며 짙은 장미향이 훅 끼쳤다. 루미너스가 급히 몸을 일으켰지만 제 허리를 감싼 손 탓에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 섰다. 시선이 마주치자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서로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어색함에 시선을 피하자 저를 부르는 팬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미너스.”

 

그 탓에 다시 눈이 마주쳤다. 왠지 모르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팬텀이 슬쩍 손을 풀어내고 루미너스를 옆에 앉혔다.

 

“눈 감아.”

 

어쩐지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목 언저리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놀라 눈을 뜨자 제 목에 무언가 걸린 것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보랏빛의 사파이어가 달빛을 받아 빛났다. 루미너스가 며칠간 그토록 가지려고 노력했던 펜던트였다. 이게 왜 여기 있어? 놀란 눈으로 펜던트를 바라보던 루미너스가 무언가 깨달은 듯 팬텀에게 삿대질했다.

 

“이거, 네가...!”

“잘 어울리네.”

 

팬텀은 루미너스의 말을 무시한 채 목에 걸린 펜던트를 바라보곤 싱긋 웃었다.

 

“왜 네가 이걸?”

“원래 사려고 했던 건 난데, 네가 중간에 가로채려 했지.”

“가로챈게 아니라 선물로 주려고 그런거야!”

“내가 없는 틈을 타서 크리스탈가든에서 내 뒷조사를 하고...”

“그, 그건...”

 

루미너스의 말문이 막혔다. 팬텀이 손을 뻗어 루미너스의 머리칼을 가볍게 정리해주었다. 손가락이 이마를 스쳐 닿은 자리가 간지러웠다. 하지말라는 뜻으로 손을 쳐내려는데 오히려 제 손을 붙잡아 뺨으로 가져다 댔다. 제 손에 얼굴을 기대오는 낯선 감각에 팔을 움츠리듯 당기자 팬텀이 같이 제게로 다가오는 바람에 오히려 팬텀을 가까이 당긴 셈이 되었다.

 

“날 위해서 엘나스까지 갔다 왔지. 설산의 마녀를 해치우려고?”

“어떻게 그걸?”

“내가 알지 못하는 정보가 있던가?”

 

그럼 알면서도 모른척을 했다고? 고생했어. 속삭여오는 말이 어딘가 낯간지러워 괜스레 짜증을 냈다.

 

“그 고생을 네가 망쳤어.”

“날 위해서 왜 그렇게까지 했어?”

 

왜 그렇게까지 했냐고? 왜 그랬을까. 미안해서? 죄책감 때문에?

 

“나 때문에 네가 다쳤으니까.”

 

팬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또 그 얘기네. 그런 말 보단...”

“그리고 네가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어.”

 

제 대답에 한순간 팬텀의 몸이 굳었다.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혼잣말을 하던 팬텀이 갑자기 루미너스를 밀었다. 반쯤 멍한 상태로 뒤로 넘어가자 소파에 등이 닿았다. 팬텀이 그런 제 위에 반쯤 올라타듯한 자세로 저를 내려다보았다. 일어나려고 버둥거리자 팬텀이 어깨를 짓눌렀다.

 

“갑자기 왜 이러는건데?”

“네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고 있어?”

“내가 한 말이 뭐?”

 

작게 한숨을 쉰 팬텀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알 리가 없지. 그날 일을 꺼내니 다시 물어볼게. 내가 왜 화를 냈는지는 알아? 아니, 너는 왜 화를 냈어?”

 

루미너스는 다시 눈을 깜빡였다. 애초에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던지 팬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이건 왜 준 것 같아?”

 

팬텀이 루미너스에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몰라. 모르니까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근데 너무 가까운 거 같은데.

 

“이것도 몰라?”

 

팬텀이 손을 뻗어 머리칼을 쓸었다. 모른다니까. 간지러운 느낌에 애꿎은 시선만 내렸다.

 

“그럼 지금 내가 왜 이러는지 맞춰봐.”

 

다가오는 얼굴이 가까웠다.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질끈 눈을 감았다. 말캉한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 순간 온몸이 굳었다. 가볍게 닿았던 입술이 떼어지고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팬텀이 손을 뻗어 루미너스의 뺨을 감쌌다. 다시금 입술이 맞닿았다. 먼젓번과 달리 긴 입맞춤이었다.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루미너스가 꾹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하, 숨을 뱉기 위해 벌려진 입 사이로 혀가 들어왔다. 질척한 혀가 입 안을 제멋대로 휘저었다. 서로의 혀가 얽혔다.

 

입안에 남은 와인의 쓴맛이 느껴졌다. 아니 단맛인가? 난생처음으로 겪는 타인과의 입맞춤에 루미너스는 어쩔 줄을 몰랐다. 손이 갈 곳을 잃고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가까이서 느껴지는 숨결이 간지러웠다. 분명히 맞닿는 것은 혀인데 몸 전체가 팬텀과 얽힌 것 마냥 찌릿했다. 숨이 가빠왔다. 갈 곳 잃은 팔은 본능적으로 팬텀의 목을 둘러안았다. 헐떡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팬텀의 눈이 빛났다. 낮은 목소리가 물어왔다.

 

“내가 왜 키스한 지는 알 것 같아?”

“...내가 어떻게 알아.”

 

겨우 꺼낸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그냥 조금 더 해줬으면.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모르겠어? 모르는 척 하는 게 아니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 팬텀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이 순진하고 멍청한 샌님을 어쩌면 좋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가르치듯 하나하나 알려줘야겠지.

 

“좋아하니까 키스한거잖아.”

“뭐...?”

"좋아해, 루미너스. 이제 그럼 다음 질문을 할까?"

"...질문?"

”왜 싫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키스해도 괜찮아?”

 

루미너스의 눈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온몸에 열이 올라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팬텀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한다. 어째서? 왜 싫다고 하지 않았어, 루미너스? 팬텀의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방금 자신은 팬텀과 입 맞췄다. 연인도 아닌데! 왜 거부하지 않았지? 어째서 싫지 않았어? 왜 입술이 떨어질 때 아쉽다고 생각했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루미너스의 표정을 보며 팬텀은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정말 둔하네, 샌님. 자각조차 없었다니.”

 

그럼 알 때까지 알려줘야지. 다시금 가까이 다가오는 팬텀을 바라보며 루미너스는 다시 눈을 감았다. 최고의 생일선물이네.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달았다. 곧이어 입술에 닿아오는 감각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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